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계집과 계집의 사랑이라니, 그것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오로지 육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음행이요 음사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금기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일까?

누가 사랑을 남자와 여자, 발기한 다리밋자루와 젖은 음부의 일일뿐이라고 정해놓았던가?

사랑은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본능, 사람이 정해 놓은 경계는 결국 사람에 의해 배반당하리라.

_ 290쪽 중에서

 

 

내에 음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가려야 하고, 무슨 소리도 쉬쉬해야 하는 궐내에 퍼진 이 소문의 속도는 그 어떤 위급한 국가적 사안보다도 빨랐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이들에게 소문의 힘은 그 어떤 권력보다도 힘이 강했던 것이다.

 

그 소문의 내용은 더욱 희괴했다. 성군 세종의 며느리이자, 조선의 다섯 번째 왕인 문종의 두 번째 부인 순빈 봉씨가 궐내에서 궁녀 소쌍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었다. 매일 밤 봉빈에게 불려간 궁녀는 다음날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왔고, 소쌍이 봉빈의 방에 든 날 밤이면 모든 궁녀를 물리치고 단 둘이서만 밤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성리학이 지배하고 유가의 지엄함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조선의 궐내에서 동성애는 괴이함을 넘어 망조로까지 여겨지는 중대 사안이었다.

 

<미실>의 작가 김별아가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사랑이라는 금기에 도전한 조선의 여인 순빈 봉씨에 주목했다. 궐내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사가로 쫓겨난 봉빈은 소설의 제목 <채홍>이 의미하는 바대로 여성을 사랑한 여성이다(채홍은 무지개를 뜻하고, 무지개는 성적 소수자의 국제제적 상징이다). 하지만 작가가 주목한 것은 봉빈이 사랑한 대상이 아니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하고자 했고, 누군가에게 절실하게 사랑받고자 했던 그 욕망을 모두 거세 당한 궐내에서 끝까지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고자 했던 그녀의 욕망이었다.

 

 

봉빈은 그로부터 <열녀전>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사내가 앉았던 자리는 물론 앞으로 앉을 자리까지 가리는 여자들을 모범으로 추앙하고 찬양하라니

기가 차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봉빈은 체증이 치밀어 오르는 가슴을 탕탕 쳤다. _ 140쪽 중에서

 

 

봉빈은 세자(훗날 문종)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세자의 첫 번째 부인은 조선의 국모로서 보이면 안 될 시기와 질투를 보였으며, 조신하게 남편을 섬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봉민은 그런 소문을 건내 들으며 자신만은 그렇지 않으리라, 자신만은 세자를 잘 보필하고 사랑받으며 장차 조선의 국모로서 손색없는 세자빈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궁에 들어가는 순간 봉빈은 문종의 첫 번째 부인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궁이란 본래 욕망이 거세된 공간이었다. 사랑의 마음은 사치였고, 악이었으며, 금기였다. 그런 궁의 공기를 마시며 자라온 세자 역시 부인을 맞이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감정을 내비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자 세자빈이 있는 곳은 발걸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어릴적 동무들이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수였다. 사랑받지 못한 여인은, 그리고 궁 안에서 왕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 외에는 모든 활동이 금지된 세자빈은 말라 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봉빈 역시 궁에 들어온 뒤에 이 같은 궁의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 곁에서 자신의 욕망을 일깨워주는 궁녀 소쌍을 만나게게 된다. 이 궁 안에서 그녀의 욕망을 분출시킬 수 있는 대상은 소쌍밖에 없었고, 그 사랑의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줄 사람 역시 소쌍 뿐이었다. 봉빈은 이 모든 것에 까발려져 궁에서 쫓겨나면서도, 사가로 돌아와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외면을 당하면서도 자신은 사랑했노라, 후회하지 않노라 외친다. 

 

메인 이야기는 봉빈이 입궁하면서부터 사가로 쫓겨나기까지를 다루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욕망이 거세된 궁궐 속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곁가지처럼 뻗어져 있다. 부인이 있지만 완벽하지 않은 육체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내시는 결국 잘못된 욕망 분출의 방법으로 부인에게 매질을 하기 시작하고, 왕의 여자라는 미명 아래 평생을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가야 하는 궁녀들은 음모와 배신이라는 삐뚤어진 방법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봉빈 말고도 궁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행간 속에 숨겨진 주변인들의 욕망을 읽어내는 것도 이 책의 재미다.

 

작가는 봉빈의 마음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봉빈은 조바심, 그리움, 사랑의 갈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솔직한 감정 모두를 부인의 도리에 부적합한 상스러운 일이라며 혐의하니, 그녀에게는 사랑이 죄였다." 아마도 작가가 이 책 <채홍>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동성애라는 센세이셔널리즘이 아니라,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능, 욕망마저 이성으로 억누르고 살아가야 했던 안타까운 우리 역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역사는 사랑을 기록하지 않지요. 애초에 못하지요. 그래서 사랑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 남긴 김별아의 이 말이 책을 다 읽고나자 가슴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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