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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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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얼룩진 20세기 초반의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지난 60여년이라는 시간동안 전 세계는 ‘발전’에 열을 올렸다. 폐허로 된 도시는 반듯하게 갈고 닦았으며, 마치 경쟁을 하듯 서로가 너 높은 고층 빌딩을 세워 올렸고, 모두를 연결하는 촘촘한 교통망 확충에 누가누가 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열심히 일 하는 것’만이 선(善)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만이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새롭게 건국하기 위해 모두가 합심해 발전을 외쳤고, 보다 더 잘 살기 위한 운동으로 ‘새마을 운동’을 함께 재창했으며, 장밋빛 청사진을 그리며 모두가 잘 살게 될 그날을 그렸다. 그렇게 우리 부모세대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끼고 또 아꼈으며, 게으름은 죄악이라 여기며 매일 매일을 열심히 일만 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6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60년 전 발전만이 모든 것을 보상하리라 믿었던 그 믿음은 여전히 유효한가? 발전의 결과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갔는가?  《반자본 발전사회》는 발전이라는 달콤한 사과가 어떻게 얼마나 큰 환상이었는지, 그것들이 가져온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밝힌다. 총 17명의 저자가 각각 발전, 평등, 시장, 한 세계, 참여, 생산, 과학, 기술 등의 19가지 개념을 가지고 다시 ‘발전’을 묻는 시도를 꾀했다.

가령 이런식이다.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을 의미하는 ‘평등’은 C. 더글러스 러미스에 의해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로 재정의된다. 사실상 부국이 이룩하는 경제 발전, 곧 부의 상당 부분은 빈국에서 들여오는 부이며, 이는 세계 경제 체제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며 불평등 위에서 굴러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경제정책으로 인해 전 세계의 평등을 예견하지만, 사실상 빈국의 소득 증가율은 0.5퍼센트에 불과하며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발전은 먼 미래의 경제적 평등을 약속하지만 4,50년이 넘은 지금도 지독한 불평등을 낳고 있을 뿐인 것이라 주장한다.

‘참여’에 대해서 마지드 라흐네마는 ‘교묘한 통제의 방법’이라 정의내린다. 1950년대 후반에 억눌린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로 처음 사용된 이 ‘참여’는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에 부딪히고 만다. 참여라는 이 착한 도구를 발견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에 힘을 싣기 위해 교묘하게 활용하였고, 민중 권력의 전개 과정 보다는 활동가들이 자신의 사명을 해석하는 데 있어 전통적인 권력 행태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데만 기여하게 되었다. 더 이상 참여는 구세주가 아니라 위험성을 내포한 조작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환경’은 정치의 영역이 되어버린 자연, 발전을 고발하기 위해 끌어온 말이지만 새로운 발전의 시대를 알리는 깃발로 전락해버린 것으로, ‘과학’은 자연과 전통의 가치들을 열등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깎아내리는 이성의 권위를 둘러쓴 권력으로 재정의 한다. ‘빈곤’은 특정한 문명의 발명품, ‘진보’는 권력과 종교적 신념의 화학적 변용이라는 발칙한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책 분량의 압박과 어려워 보이는 단어들로 가득한 책이지만, 한번만 더 들여다보면 결코 먼 남의 이야기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저자들마다 글쓰기의 편차가 있고, 주장의 근거도 역시 각 주제어마다 천차만별이지만 그동안 긍정적으로만 생각했던 각 단어들을 다른 시각으로 읽어본 새로운 시도는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위해,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사고를 바로잡기 위해 책이라는 것을 읽는다. 이 책도 그동안 수많은 주장에 인용된 ‘긍정적인’단어들이 실은 얼마나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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