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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가게
너대니얼 호손 외 지음, 최주언 옮김 / 몽실북스 / 2016년 8월
평점 :
지난 달에 클로디아의 비밀을 읽었다. 나는 클로디아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모험 하기를 싫어하는 범생이라는 나와의 공통점 때문이다. 목욕과 편안함을 좋아해 가출조차 미술관으로 가는 클로디아와 마찬가지로 나는 집에 들어오면 도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집순이다. 장기휴일이라도 잡히면 끼고 읽을 책 주문하기 바쁘다. 도통 지붕 없는 하늘 아래로는 나가는 법이 없다. 더위도 싫고, 추위도 싫고, 배 고픈 것도 싫고, 땀 나는 것도 싫고, 사람 많은 것도 싫고, 싫은 것들이 무궁무진한 어른인 내게 모험이라곤 오롯이 책 뿐이다. 그래서 동화나 우화, 판타지풍 이야기들을 주로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건 동화 같은이 아니라 그냥 동화다. 잠깐 내 취향의 상실을 의심하기도 했으나 스트레스성 강제 휴덕기를 잘 극복한 지금은 예년의 취향 컨디션을 회복했다. 시험 삼아 클로디아와 삐삐와 제임스와 앤을 만나봤는데 워낙 여러 책을 섞어 읽어 아직 클로디아를 빼고는 채 완독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재밌었다. 그러다 몽실카페에 마술가게의 출간소식이 올라왔다. 책 소개글을 보고 동화와 우화, 환상소설을 좋아하는 내게 잘 맞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동화는 아니고 동화 같은 느낌을 풍기는 단편 모음집이지만 신간 중에선 가장 구미에 맞았다. 표지부터가 상상할 여지가 넘쳤다.
클로디아의 가출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까진 무리더라도 ㅡ 그쯤됐으면 이미 이 책은 대형출판사 차지겠지 ㅡ 대신에 그 앞 골목길, 아니면 버스, 엘리자베스 시절의 침대나 코인 세탁기 내지는 분수 정도의 역할은 해주리라 기대하며 구입했다. 노랑 바탕에 수탉과 비커와 플라스크와 모자와 소년,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데 모인 표지는 취향이었으나 안심하긴 이르다. 표지와 삽화와 제목에 당한 배신이 숱하다.
삽화부터 착착 훑었다. 목소리 섬과 마술가게, 초록문, 눈먼 자들의 나라, 양 강가의 한가한 나날, 그리고 페더탑. 어떤 건 취향이고 어떤 건 살짝 심심하다. 이야기가 한결같이 취향이었던데 비하면 삽화는 약간의 기복이 있는 편이지만 이 정도면 준수하다.
<널찍한 곳, 편안한 곳, 지붕과 벽이 있으면서도 되도록이면 아름다운 곳으로 > 숨어 들어가는 가출을 했던 클로디아처럼 나도 내 방에서 하와이와 영국과 또 영국, 에콰도르와 가상세계 얀강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들을 오가며 편안하게 독서를 즐겼다. 마술가게 속 이야기들은 확실히 우화와 고전동화 같은 맛이 있었는데 짧고 환상적이며 어딘지 애매하고 슬몃 잔인한 점에서 그렇다.
같이 구매한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와 함께 읽으며 마술가게를 천천히 읽으려던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책을 읽어내렸다.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던 탓이다. 본래는 매일 한편씩 읽으려 했는데 지나치게 빨리 읽혀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한결같이 환상과 순수와 동심을 이야기 하고 있었고, 그 주제들이 적절히 배치된 구성은 아름다웠다. 사소한 걱정과는 달리 회복된지 얼마 안된 내 독서욕구도 꺾이지 않았다. (간신히 회복된 욕구가 8월에 읽은 어느 책으로 말미암아 무참히 내려앉을 뻔 했으므로 나는 근래 좀 신중한 마음이 있었다. 주문책들의 절반이 이미 한번 읽은 책들이라는 점이 그 증거다ㅡㅡ;;) 클로디아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다이나믹 하지는 않았지만, 분수만큼의 기쁨은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 분수에서 목욕하다 관람객들이 던져놓은 동전을 건져올리며 기쁨을 터트렸던 클로디아와 제임스처럼 나도 반짝반짝한 이야기들을 몇 개나 건져올렸다.
<케올라의 환상적인 모험을 믿지 못해 경찰에 신고하는 선교사. 마술 앞에서 성난 표정을 지으며 유리구슬을 던져버리는 아버지와 그에 비교해 겁을 먹지도, 혼란스러워 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기분도 좋아보이는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 환상의 문을 지나쳐버리는 어른. 사회부적응자라는 이유로 나를 사랑스럽게 보는 남자의 상상력을 수술 시켜버리려는 여자. 족쇄와 수갑을 차지 않는 시간 앞에서는 죽어버리는 신들. 존재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 누더기를 걸친 졸렬하고 텅빈 현실에서 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 반짝반짝한 환상들을 잃어버린 허수아비> 가 있었다.
책을 읽으며 옛 동화들과 그 동화를 좋아했던 어린 나와 잔인한 고전동화가 정서에 안좋을까봐 창작동화만 읽힌다는 요즘의 부모님들 성향과 거인처럼 커져 바다를 건너는 칼라마케 보다 목소리 섬에서 새색시를 맞이하는 케올라에 더 집중하며 인상 찌푸렸던 나를 생각했다. (나는 누가 죽는다는 이야기 보다 이런 이야기를 더 싫어한다. 그러니까 부인이 둘이나 셋쯤 되는 이야기들. 살인 앞에서도 끄떡없던 도덕적 안테나가 쭈삣 올라간다. )
어른인 우리는 어느 순간 환상과 상상의 세계를 믿지 않고 현실에 끼워맞추거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비난하고 겁을 먹고 도려내고 멀어지고 평가해 버린다. 족쇄나 수갑에 영원토록 시간을 죄어놓고, 어떤 질문도 의구심도 표하지 않는 방법으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며 어린이로 남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어느 시기가 되면 정체 모를 거인의 발 아래 내 환상과 동심은 깡그리 짓밟혀 흔적조차 희미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희미하다는 것이지, 납작 눌려져 있다는 것이지 아주 사라진게 아니라는 걸 나는 이렇게 동화와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새삼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환상을 그저 환상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희미한 동심과 환상에의 개방성이야말로 우리들의 초록문이자 한가한 나날들이자 골짜기 밖이자 우리의 영혼을 보살피는 신들과의 만남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해가 흘러갈수록 내 상상은 약해지고 있고 내가 꿈의 땅에 가는 일도 점점 없을 터이니, 서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선장과 나는 한참을 서로 바라봤다.
양 강가의 한가한 나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