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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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집에서 87, 88년의 이야기가 화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티비에서 88 올림픽 성화 봉송이 나오고 비둘기가 타죽었댔나 어쨌댔나 하던 이야기 끝에 내가 동네 아이들과 함께 노태우노태우 떼창을 부르고 다닌 일이 거론되었다. 그럴 리가 없다,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는 나와 절대 그랬다는 엄마의 대립은 또다른 목격자(?)의 증언으로 사실로 밝혀지며 나를 기함하게 했다. 어린애가 뭘 알고 그랬겠냐, 선거유세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며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지만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민주화의 진영에서 깃발을 휘날리진 못할 망정 노태우를 부르짖고 다녔다니 그 시절로 돌아가면 내 입을 꿰메버리고 싶었다. 서른의 반격 그 시작은 내 그런 수치스런 기억을 일깨우며 88년도로 거슬러 올라갔다.

호돌이 마크가 전국을 도배하고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에 대한 노랫소리가 거리거리를 매우던 때, 우리 사는 세상에 보통 사람 노태우가 믿어주세요 하며 정권을 장악하던 그 해에 김지혜가 태어난다. 엄마의 출산 봉기가 없었더라면 임종하신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추봉이가 될 뻔했던 지혜씨. 작명의 시작부터가 유별났던 지혜씨. 그러나 지혜씨의 그런 "튐"은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88올림픽에 출전한 칼 루이스는 내 앞을 달린 인간은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벤 존슨은 남의 등짝이나 보고 달린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며 경쟁하는데 우리 보통사람, 우리 평범한 지혜씨는 88 올림픽을 전후하여 태어난 세상 많은 칼 루이스들과 벤 존슨들의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타인에게 앞자리를 내어주고 무수히 많은 남의 등짝을 보며 서른으로 자랐다. 나라고 뭐 달랐겠냐만은. 쓰고 보니 박탈감 캬~ㅠㅠ 살면서 나보다 ㅇㅇ 잘하는 인간 본 적 없음 이런 말 비슷한 것도 해본 적이 없는 보통 사람 입장에서 칼 루이스, 벤 존슨의 말은 멋있으면서도 흥칫뿡이다ㅠㅠㅠㅠ

어쨌든 보통 내지는 보통미만사람으로 눈물을 닦을 일은 많았어도 성실하게 살았던 지혜씨.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라 서른의 나이에 인턴 7개월차, 정직원 기약없음, 정직원으로 등업하고 싶지도 않음, 이 정도 자리에 오려고 아둥바둥 공부했나 허탈감 장난 아님, 빌라 5층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계속계속 하락하여 현재는 지하방 신세, 단번에 취직한 남친과 달리 계속된 취업 고배로 갈등하다 헤어짐, 친구들은 결혼을 기점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딱 하나 남은(것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유일등장) 유부녀 친구는 미혼의 불안과 외로움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넌 좋겠다 시전, 학창시절 자기를 도둑으로 몰았던 때려죽여도 시원찮은 웬수 동명이인 김지혜는 갑으로 등장한다. 읽다 보면 누구 생각나는 사람 다들 한 명씩은 있을 것이다. "너랑 나랑"(은 절대 안되지~ 아이유 노래인가요. 자꾸 눈물이ㅠㅠㅠㅠ) 인생 왜 이러냐 소리가 절로 나올 만한 그런 시기에 지혜씨는 유례없이 특별한 상대를 만난다. 소설이라 현실과는 달리 반전 같은 삶의 활력소가 등장해 주시는 것이다. 이름 이규옥. 나이는 지혜씨와 같은 서른이다. 지혜씨네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와 일 잘한다, 성격 좋다 칭찬이 자자하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다. 곰돌이를 닮은 외향적 특징과 능글맞음으로 철벽치기 쉽지 않지만 첫만남이 워낙 강렬했기에 지혜씨는 이규옥을 믿지 못한다. 어떤 특별한 만남이 있었는지는 비밀, 그러나 그들의 만남으로 인하여 지혜씨가 아무래도 규옥씨도 함께 성장했다는 것은 안비밀. 깜빡 속아 하마터면 성장물이 아니라 연애물인가 착각할 뻔 한 것도 안비밀 ㅋㅋ 아차, 지혜와 규옥 그리고 우클렐라 반 회원들의 우연한 합작으로 시작된 세상을 향한 핑퐁 같은 반격들도  잼나다. 소소하지만 딱 보통사람다운 반격들이 귀엽다.

워낙에 리뷰들이 좋아 기대가 컸는데 그 마음 더 컸어도 좋았을 뻔 했다. 고작해야 이백, 장편소설이 이토록 간략해도 되는 건가요 하는 생각도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쏙 들어간다. 한문장도 빠트리지 않고 책이 통째로 공감이다. 김지혜의 서른. 가난하고 불안하고 사랑은 적고 교류는 희박하고 오해는 확장되고 세상은 나이가 들수록 좁아지는 것 같은 청춘의 순간순간들이 답답하고 슬프고 회의적이고 쓰지만 그럼에도 낭만적인 반격들이, 김지혜의 고민과 성장이 사랑스럽다. 어떤 순간들의 낭만은 분명 판타지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그 느낌까지 청량하게 소화시켜 본다. 우리 보통사람, 쓰레기 같은 누구 말고 진짜 보통사람들인 우리를, 청춘을, 믿어주세요 라는 느낌으로. 이래봬도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 ㅎㅎ 라는 멋적지만 따뜻한 위로를 덤으로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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