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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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가 생각하기에 죄와 잘 어울린다는 것만큼 사십대를 제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없었다. 사십대야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즉 사십대는 권력이나 박탈감, 분노 때문에 쉽게 죄를 지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만해서 손쉽게 악행을 저지른다. 분노나 박탈감은 곧잘 자존감을 건드리고 비굴함을 느끼게 하고 참을성을 빼앗고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의감으로 포장하게 만든다.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p78)

아내와의 여행길에 올랐던 오기는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된다. 병원에서 처음 눈을 뜬 그는 자신이 사지육신을 움직이지 못함은 물론 말을 할 수도 정상적인 식사를 할 수도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는 상태임을 알고 괴로워한다. 일찌기 모교에 자리잡은 교수로 간간히 진행하는 외부 강의에서도 훌륭하게 인정을 받아 점차로 성공이라는 울타리에 삶을 기대기 시작한 남자가, 무엇보다 지성을 갖춘 성인이 생의 전반을 타인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이란.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고 일견 아내를 부러워하는 그 마음에 안타깝고 동정이 이는 것이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딸마저 저세상으로 보낸 장모에게 의탁해 집으로 돌아온 오기.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가 독자로서 어렵지는 않았다. 환자를 학대하고 희롱하는 간병인과 간병인의 아들, 오기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거짓 목사의 안수기도 등으로 오기의 분노를 부추키는 장모의 어리석음 같은 것들. 이야기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 것은 오기가 시도한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간병인을 내쫓은 장모로 인해 홀로 남겨진 오기가 온힘을 다하여 누른 기억하고 있는 단 하나의 번호, 수화기 너머 여자의 목소리, 울음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전화기의 재다이얼을 누르는 장모의 손길까지.

"나한텐 딸 뿐이고, 자네한테는 나뿐이네. 그걸 알아야 하네." (p170)

기이한 형태로 시작된 장모의 집착이 오기의 공포를 부추긴다. 밖에서 정원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옮겨심은 식수들, 집에서 모조리 사라져버린 고용인들, 창에 덧대어진 방범창, 방범창을 싸고 오르는 덩쿨식물,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정원 한켠에 연못을 만들겠다는 장모의 삽질, 정원 곳곳의 구덩이들이 조마조마하다. 대문을 열고 나선 오기의 배밀이가 정원 문에 가로막힐 때 느낀 좌절감이 이토록 또렷한데 책을 덮은 지금에 와서는 내가 더는 오기를 응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재미있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원이 갖추어진 표지의 타운하우스 속에 내재한 동공의 의미를 잘못 파악했음을 알지 못했던 탓이다. 인생의 매 분기마다 인스턴트 음식을 데우듯이 빠르게 욕망하다 간편하게 식어버린 아내의 인생. 동경하던 수전 소택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삶 어느 언저리에도 머물지 못한 채로 남편의 성공에 박탈감을 느끼고 분노하는 듯한 아내의 실패와 경멸에 먼저 눈을 뜬 탓이다. 가만 생각하면 오로지 오기의 입으로만 전해지는 자기 중심적인 회고에 순순히 감정을 이입한 탓이었지만 이런 류의 피하지 못한 함정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하는 것이기에 만족한다. 장모에게까지 드리워졌던 아내의 긴 그림자가 저 번듯한 집의 구멍이라 생각했던 것에 실소하며 나 또한 오기의 동공을 덮는 데에 한 삽을 보태련다. 천망회회의 가을 하늘이 더욱 깊게 느껴지는 하루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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