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오퍼나지(비밀의 계단) 같은 습하고 어둡고 고전적인 느낌의 유럽풍 환상 소설을 만났습니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국인 작가 프랜시스 하딩의 걸출한 다크 판타지 <거짓말을 먹는 나무>입니다.

14세의 소녀 페이스 선더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목사이며 저명한 과학자였던 에라스무스 선더리가 나무에 목을 매단 채 언덕 위의 거센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머틀이 가족의 명예를 위해 그의 자살을 과실치사로 위장하려 애쓰던 때 페이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타살이라 확신하며 부친의 기록물을 뒤집니다. 숨겨진 그의 일기 속 "거짓말을 먹는 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무의 실체를 발견하던 날 페이스는 거짓말을 먹고 진실을 토해내는 나무로 하여 진범을 붙잡고 말겠다는 욕망에 온몸을 내던지게 됩니다. 선더리 일가를 모욕하고 위협하는 베일 섬의 사람들, 에라스무스로 하여금 섬을 방문하게끔 만든 숨겨진 음모, 천지창조와 진화, 엘렉트라 컴플렉스, 잔바티스타 바실레와 그림형제의 잔혹동화를 떠오르게 하는 분위기, 남과 여, 진실과 거짓으로 점철된 흥미로운 여정 속 페이스의 놀랄 만한 거짓말은 생명을 얻은 듯 몸뚱이를 불려가는데요. 에라스무스의 유령이 나타났다, 에라스무스의 유령이 살인범에게 복수하려 한다, 에라스무스가 발굴에 참여한 동굴에서 스페인의 보물이 발견되었다 등 폐쇄된 섬의 평범한 주민들을 공포와 탐욕에 물들게 하는 거짓말의 종착지는 어디일런지, 폭풍의 언덕처럼 함께 하는 순간 광기를 폭발시키는 소년 폴과의 관계는 또 어떻게 풀리려는지 잠 못드는 밤의 기나긴 독서가 환상처럼 내려앉는 시간을 선사합니다.  

"네가 아들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족의 재산을 늘려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딸은 절대로 그러지 못해. 넌 절대로 명예롭게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고, 과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성직이나 의회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일을 해서 잘 살 수도 없어. 어차피 넌 평생 내 지갑을 털어가는 짐 밖에 안 돼." (p147)

페이스는 똑똑한 아이입니다. 홀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독학했고 부단히 아버지의 서재를 드나들며 과학적 지식을 쌓았으니 요즘으로 치면 천재는 아니어도 영재라 할 만 합니다. 그러나 여자죠. 딸입니다. 아버지와 남자 형제 또는 남편의 부양이 아니면 먹고 살 수 없는 "식충이".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이 가지는 한계가 에라스무스의 폭언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때 그리고 반전처럼 이 모든 부당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의심하면서도 아버지에게 내보이는 소녀의 맹목이 전사처럼 불타오를 때 소설은 뜨거운 감자가 되어 독자의 마음을 태웁니다. 과학자로 높은 명성을 쌓는 동안 가정 내에서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열렬히 흠모하는 딸의 모습은 별스러운 양상은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폭압에 눌린 어머니를 동정하는 동시에 멸시하고 경멸하며 죽기를 바라는 것 또한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지요. 그렇대도 14세 소녀의 몸통과 정신을 압박하는 코르셋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성숙하고 정직하고 똑똑하고 용기있는 페이스였기에 그 비논리적인 감정이 더 극대화 되어 와닿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여성 독자이기에 더욱 반감이 생긴 걸수도 있겠군요. 페이스가 굴복하고 굴종하는 여성이라는 벽이 아직도 두텁게 남아있는 세상에서 요즘의 우리는 매일같이 페미니즘과 그에 대한 반동을 목격 중이니까요.

19세기 대영제국에 혼재했던 가치관의 갈등도 지금에 못지 않았습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며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지요. 신학자와 과학자들의 엇갈린 신념 속에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과학적 증거가 반목하고 천지창조 보다 훨씬 이전의 지구존재를 증명하는 화석들이 유수의 석학들 손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을 뒤엎는 과학의 도래 앞에 남성적 신화에 가리어져 있던 여성의 억눌린 욕망이 페이스를 통해 깨어나기에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소란스러움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뉴 펄튼 화석(성경 속에 등장하는 네피림이라는 고대 인간의 화석)이 결국 가공된 거짓으로 에라스무스를 무너뜨린 것처럼 우리 시대에 남은 여타의 젠더싸움도 언젠가는 과거의 유물로써 종말을 맞이하겠지요. 결코 막을 수 없는 시대의 유유한 흐름 위에 미스터리, 마법, 종교, 역사, 그리고 페미니즘을 양분으로 끼얹어 환상으로 열매 맺는 나무를 찬찬히 들여다보시길 추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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