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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비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정미경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9월
평점 :
정미경 작가의 큰비를 맞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펼쳐들 적만 해도 역모를 일으키겠다는 사람들이 겨우 고깃국 한 사발에 갈등하는 것이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큰일을 도모하는 중에 삿된 것을 몸에 담으면 안된다며 백성들이 준비해 준 술과 고기를 금하는 19세 어린 무녀 원향의 파르르한 노기도 철없게만 느껴졌다. 본인의 이념에 저어되는 모든 것을 배척하는 태도가 어린애의 아집 같아만 보였다. 그녀와 갈등하는 행동대장 정원태의 도성 입성을 막은 미륵 화신 여환과 여환을 왕처럼 추대하는 영평 지사 황회의 선택은 또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합리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무엇보다 무리의 지지를 얻어내지도 못하는 지도층의 주장과 그에 따른 분열은 시작도 전에 이 반역이 실패할 것이라는 강렬한 암시를 전해왔다. 주인공 무리의 패배를 독자의 앞에 번듯이 올려놓고 무슨 흥미로 남은 페이지를 읽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추구하는 역모의 방향성이 지나치게 기이했다. 역모이되 역모가 아닌 것. 칼을 빼들어 관군을 무찌르거나 궁으로 짓쳐들어가 왕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용신을 받든 원향이 치성으로 굿을 올려 큰비를 내리고 대홍수를 일으켜 궁을 떠내려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도성 안 양반님네들을 다 쓸어내어 양반은 상놈되고 상놈은 양반되어 귀천없이 살겠다는 것이다. 허무맹랑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소설이기로서니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냐 하고. 역사 소설이 아니라 판타지 소설이냐 코웃음 치며 가소로와 했다. 그 가소로움이 조선시대 박해받던 무녀들의, 힘없는 백성들의, 소리없이 스러져간 삼천리 여인들의 켜켜이 쌓인 한 앞에 이렇게 금방 바스라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누구의 희생도 자처하지 않고, 터럭 한 올 죄없는 자를 해하지 않으며 신령의 힘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무녀들의 순수하고 어리석은 의기가 벅차서, 안타깝고 또 미안해서, 한 문장 한 문장 읽는 내내 많이도 울었다. 조선 팔도 가엾지 않은 역사가 없다지만 무녀들이 당한 그 짐승 같은 처우와 분노도 슬픔도 한도 백성에 대한 긍휼로 승화시키는 바랄길 없는 너그러움이 더욱 원통해 사무쳤다.
만신이라는 것이, 신을 모시는 무당이라는 것이 죽은 사람의 못다한 시간을 받아 그 시간을 풀어내는 사람이라 하는데 그렇담 이 글을 쓰는 순간에 작가 정미경이 만신이 아니었을까. 바짝바짝 마른 가뭄과 대기근의 한가운데 나랏님과 사대부 손에 끌려나와 솜옷을 입고 얼굴을 녹이는 화로를 머리에 인채 비를 부르며 죽어간 가엾은 여인 하랑과 붉은 철릭을 입고 꽃갓을 쓰고 신명나게 춤추며 어진 여인들의 혼을 어루만지던 원향과 원향의 걸음에서 스무 남짓하게 떨어져 신꽃을 만들여 좇아오는 희재와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꿈꾸던 여환과 황회의, 밭 한뙈기 꿈꾸던 배고픈 백성들의 그 시절 못다이룬 꿈을 한 올 한 올 풀어 가슴 무너지게 연풍돌기 하는 한풀이 같은 책이 아닌가 하고. 참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저 아득하기만 한 이야기가 17세기 역사의 한토막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신기하여 더욱 꿈 같다. 초가을 밤을 적시는 좋은 책, 작가 정미경과 세계문학상을 앞으로도 내내 응원하련다.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