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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평점 :
"소설다운 소설에서 일단 무기가 등장하면 그것은 사용되어야만 해."
22구경 롱 라이플을 들고서 셋째딸 세리외즈(심각한 여자)의 머리통을 박살내려는 느빌 백작의 대사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무렴. 그런 소설은 있을 수 없지. 제목에 범죄까지 등장하는데 사냥총을 꺼내놓고 그냥 손 놓는다는 건 미스터리 독자에 대한 우롱이다. 그렇담 왜 평범한 파산가 느빌 백작은 평생 사용해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총을 모퉁이 탑 창고에서 꺼내와야 했는가. 어째서 셋째딸 세리외즈를 살해하기로 마음을 먹었는가. 이야기는 우울한 청소년 세리외즈의 한밤의 외출로부터 시작한다. 9월 벨기에 숲의 추위를 예상하지 못하여 오들오들 떠는 모습으로 발견된 세리외즈, 세리외즈를 발견하여 느빌 백작가에 전화한 예언가 포르탕뒤에르 부인, 딸을 데리러 가서 "초대된 손님 하나를 죽이게 될 겁니다"하고 예언 받는 느빌 백작. 초반의 갈등이 점쟁이와 백작 사이에서 대수롭지 않게 시작되었다면 중반의 갈등은 죽음을 원하는 세리외즈와 딸의 호소에 휘둘리는 심약한 아버지 느빌 백작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어머니, 요정처럼 사랑스러운 언니 엘렉트르(아가멤논 딸의 이름), 귀족가의 선망받는 예비 사위감 오빠 오르세트(아가멤논 아들 이름) 사이에서 성장하며 세리외즈는 아가멤논에게 살해된 어린 딸 이피제니의 운명에 매료된다. 존재감 없는 제 이름이야 어떻든 언니오빠의 이름을 그따위로 지었을 때부터 운명은 작동하여 예정된 수순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십대의 숙명론자는 아버지의 손에 죽기로 결심하고 마는데.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들 부녀에 대한 다섯 가지 사안을 궁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 우리로 치자면 2017년도 즈음하여 태어난 남매들 이름을 박근혜, 박지만, 박근령으로 지은 건데 자식 이름 가지고 장난 치는 아버지의 심상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일까?
2. 딸의 염원이 중요하기로서니 느빌 백작이 너무 쉽게 살해 욕망에 굴복된 게 아닐까?
이 비정상적인 욕망은 실로 운명의 힘일까? 아니면 지옥같은 불면증의 여파일까?
3. 아버지를 유혹하여 너를 살해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세리외즈는 꿈처럼 무사히 죽음에 도착할까?
세리외즈는 진정으로 깨진 수박처럼 머리가 터져나가는 죽음을 바라는걸까?
4. 아가멤논의 수레바퀴가 느빌 백작가를 치받기로 결심한 게 맞다면 느빌 백작 또한 아가멤논의 전철을 밟게 될까? 딸을 죽인 남편에게 아내가 복수하고,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다시금 그 딸이 복수하는 아가멤논과 엘렉트르의 신화가 이곳 2014년의 벨기에에서 완성되기에는 쪽수가 너무 적지 않나?
5. 느빌 백작가의 남자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겨 준비해 온 플리뷔에성의 마지막 대잔치는 그리하여 커튼콜을 받으며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을까?
신화적 이름과 연결되어 느끼는 운명에 대한 강렬한 충동, 성장이 피곤한 사춘기 소녀의 우울, 벨기에 귀족의 허례의식, 적의 숨통을 끊는 저격수처럼 군데군데 숨어서 독자의 웃음 과녁에 텐텐을 쏘아대는 유머감각. 이렇게 재밌는데 137 페이지 밖에 안되다니!! 이거야 말로 느빌 백작가의 진정한 비극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