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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를 읽고 대위의 딸을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러시아 제정 역사의 면면을 담은 채 비판하는 작품이지만 겉으로는 "동화다운 해피엔드" "만화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 "단순한 연애소설" (청춘의 독서 중)로 위장하고 있다하니 고전이라면 머리에 쥐부터 나는 나도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는 그가 소개해 준 많은 책들 중 유일하게 만만히 접근하여 완독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본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17살이 된 뾰뜨르 안드레예비치 그리뇨프는 늙은 하인 사벨리치와 함께 변방의 벨로고르스끄 진영으로 가는 중이다. 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근위 중사로 등록되어 있었으며 국가에 충성하는 신실한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실제로도 군인이 되었다. 음주와 노름, 시와 결투, 게으름 등 모든 철없는 짓들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써야 원치 않은 일이었겠으나 거대하고도 강력한 손아귀를 가진 아버지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리하여 부임하게 된 땅에서 소설의 제목인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를 만나게 된다. 애칭의 연유야 알 수 없으나 마샤로 불리는 마리야와 뾰뜨르는 젊은 애들닮게 일찍히 사랑에 눈을 뜨고 입맞춤을 하며 결혼을 약속하지만 가난한 대위의 딸에 대한 아버지의 반대는 뜨겁고 삼각관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살인병사 쉬바브린의 사악한 농간도 적지 않다. 청춘이야 불타오르든 말든 예카테리나 2세가 통치하는 제정 러시아의 역사 또한 고달프기 그지없다. 이민족과 농민, 농노의 반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중이었고 마치 조선의 임꺽정 같은 존재가 지방에서 들고일어나 야금야금 땅 따먹기를 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뿌까쵸프. 한 때 걸인으로 폭설 속에 갇힌 뾰뜨르와 만나 뾰드르 주머니에서 보드까 한 잔과 토끼 외투를 털어낸 남자이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황제를 참칭하며 뾰뜨르와 마샤가 있는 진영으로 진격해오니 딸이 겁낸다는 이유로 하나밖에 없는 대포까지 애들 놀이감으로 던져줬을만큼 기강없고 허약한 벨로고르스끄는 채 오분도 버티지 못한 채 반란군을 그 가슴에 활짝 품는다. 뾰뜨르의 마샤의 애정전선에 바야흐로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 이 시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만 같은 인물들이 소설 속에 대거 등장한다. 귀족가의 방약한 도련님 뾰뜨르와 그의 늙은 하인 그리뇨프 그리고 반란군 황제 뿌까쵸프까지. 사기를 당하고 칼에 찔리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도 잠깐 속 쓰려 했다가 다시 허허실실 사랑에 집중하는 도련님이나 아무 죄 없이 그 도련님에게 화풀이 당하고도 지옥까지 당신을 쫓아가겠노라 도련님의 옷도 챙기도 돈도 챙기고 다기세트도 챙기고 급기야 도련님의 여자까지 챙기는 그리뇨프의 우스꽝스러움이 재미있다. 제 비위를 맞추는데 여념없지만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땐 얼마든지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믿을 수 없는 부하들과 질 것이 뻔한 싸움 속 개죽음을 예상하면서도 물러서지 못하는 남자 뿌까쵸프가 참형 당하기 직전의 짧은 순간에 우정을 나눈 친구에게 보이는 눈인사도 명예롭다. 뿌쉬낀의 내면에 자리하는 모든 삶의 긍정이 이 작품 안에 다 쏟아진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폭설과 가난과 병마와 전쟁이 슬프지 않다. 노엽지도 않다. 그래서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라는 그의 긍정을 믿게 된다. 그의 시를 믿을 수 밖에 없는 증거들을 여기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 속에서 찾아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게 고전이 주는 즐거움일까.
덧붙여 이 작품은 강력한 전제군구였던 니꼴라이 1세의 검열 속에서 출간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집중했지만 러시아 역사에 무지하다 보니 유시민 작가의 충고대로 "검열이 없었더라면 달라졌거나 소설에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들이 무엇인지 살피면서 읽는 것"은 영 어려운 일이었다. 단지 낭만적으로 비추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이를테면 뾰뜨르와 마샤의 파랑새 같은 역할을 해주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명령 등, 군주의 한 마디에 별 조사도 없이 판결이 뒤엎어져 버리는 사태 등을 미약하게나마 느꼈을 뿐인데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은 그냥 포기하고서라도 재미로만 읽어도 좋을 쉬운 고전이다. 러시아 문학에 막 발을 들이려는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