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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를 보여주마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4월
평점 :
책을 보는 내내 영화 보통사람이 떠올랐다. 안기부에 의해 조작된 증거로 가짜 연쇄살인범을 체포하는 형사 손현주, 체포된 범인이 사실은 범인이 아님을 알게 된 기자 친구 김상호, 김상호를 고문하여 죽이고 진실을 파묻는 권력 장혁의 대립이 꽤나 볼만했음에도 나는 별점 두 개의 테러를 마음 속으로 날렸다. 그야말로 보통사람의 보통사람에 의한 보통사람다운 복수에 숨이 콱 콱 막힌 탓이다. 강력계 형사인 손현주는 안기부에 친구를 잃는다. 잃은 친구의 복수를 위해 뛰다 그 권력에 다시 아내를 잃고 아들을 잃을 뻔 한다. 그 어마어마한 분노로 감행한 복수라는 것이, 제 손에 총을 쥐고도, 고작해야 그 권력의 수뇌부도 못되는 핫바지 장혁을 끌고 와 수사대 피의자 자리에 앉힌 것이 다였다. 그 뿐이었다. 권력은 심판받을 생각도 용서를 빌 생각도 부끄러움도 없는데 정의롭고 용감하고 우직한 보통사람은 복수조차 상식 선에서 끝낸다. 그들에겐 없는 상식을 우리끼리만 악착같이 지키고 앉은 그 꼴이 너무나 보기 싫었다. 영화의 결말엔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코뿔소를 보여주마도 그래서 겁이 났다. 비슷한 양상을 띄는 이야기였던 탓이다. 권력에 의한 왜곡과 조작, 고문과 가혹행위, 죄없는 이들의 죽음으로 진실은 파묻히고 가해자는 멀쩡히 잘 사는 이야기. 복수라고 행해지는 행위의 결말조차 덧없는 그런 전개로 나아가지 않을까 의심이 일었다. 분명 처음엔 그랬다.
1980년대 공안정국 시대에 권력은 아무 죄없는 대학 강사와 화가와 교사를 샛별회라는 명칭으로 묶어 물고를 한다. 평범한 남편, 아빠, 사회인이었던 그들은 하루아침에 빨갱이가 되어 둘은 목을 매고 한 명은 단식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나 그들 샛별회를 엮은 인물들인 검사 출신 변호사 장기국, 보수언론인 백민찬, 고문관 권영욱이 실종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게 된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는 단테 신곡 속 강력한 메시지와 함께. 마치 경찰을 우롱하 듯, 아니 경찰을 끌어들이려는 듯 파격적으로 범죄와 사체를 노출시키며 달려오는 그들 코뿔소들은 그들을 뒤쫓는 강력계 형사 두식과 검사 준혁, 프로파일러 수연을 우롱하며 그들의 발자국 위로 죄인들의 펄펄 끊는 피를 퍼붓는다. 용암같이 뜨겁고 맵고 달은 복수극의 서막과 종결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이것이 한국 소설이 맞나 싶었다. 용두사미의 김빠진 콜라 같은 결말은 없었다. 나라가 우리를 죽였는데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서도 다시 나라의 앞마당을 개처럼 지키는 보통사람의 꼬라지도 없었다. 보통사람들의 신물나는 우직함과 정직함에 피로가 쌓이게 될까봐 걱정했던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복수소설이라는 캐치프라이즈가 부끄럽지 않더라. 대박!
"침묵 당하는 모든 진실은 독이 된다." (작가의 말)
코뿔소를 보여주마는 권력의 횡포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이다. 진실 앞에 침묵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자비도 관용도 없는 소설 속 복수 같은 건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거대하고도 몰상식한 사건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내가 저런 일 당하면 저 새끼들 다 때려죽이고 감방간다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스스로가 결코 그럴 수 없을 사람임도 안다. 닭 모가지도 손수 비틀어 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형사 두식이나 두식의 모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를,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는대도 그 권력 앞에서 공손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는 류의 보통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너무 잘 알아서 그저 당하기만 하는 보통 사람들의 얘기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정의고 나발이고 그들이 사람 같잖은 짓을 해도 우리는 사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도 지겨워 죽겠다. 그들은 벌레처럼 우리를 짓밟는데 왜 우리는 사람 같지 않은 것들을 사람인양 처벌해야 하는가. 그들은 법망 위에서 군림하는데 왜 우리는 법망 안에서 그들을 처단해야 하는가. 어째서 소설에서까지, 영화에서까지 보통사람으로서 그 위치에 충실해야 하는가. 판타지라면 판타지답게 속 시원하게 벌해주십사, 죽여주십사 하는 바람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시뻘겋게 펄펄 끓는 이 책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현실에선 결코 실행할 수 없는 바람을 떠안은 이 판타지에 쾌감이 인다. 죽일 놈들을 그야말로 호기롭게 다 쳐죽이는, 더 많이 죽였여도 좋았을 것 같은 그런 소설이었다. "코뿔소의 뿔은 죽기 전까지 자라는 걸 멈추지 않는다. 싸우다가 부러져도 다시 돋아나 평생을 자란다." 그 평생이 복수의 끝에 맞닿아 있다면 당연히 더 죽여 마땅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나는 너무 비틀어진 사람인걸까. 온몸으로 김을 뿜는 열 오른 코뿔소에 확 들이받히고 나니 얼떨떨하여 더 본심이 쏟아진 듯도 하지만 뭐 어떤가. 생각은 자유인데. 역사는 서글퍼도 복수는 후련하니 아주 속 시원하게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