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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어 데스 ㅣ 스토리콜렉터 50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11월
평점 :
야생의 백조라는 동화가 있다. 여타의 세계명작동화전집에서는 백조왕자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내가 가진 계몽사 세계의 동화에서는 야생의 백조로 번안이 되어 그 옛날의 동화책을 찾는 분들로 하여금 계몽사판 백조왕자가 분명 있었는데 왜 없지 하며 잦은 혼란을 주는 책 중의 한 권이다. 안데르슨의 동화로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멀고 먼 남쪽나라의 임금님에게는 엘리자라는 공주와 11명의 왕자들이 있었는데 사악한 마녀의 저주로 공주는 왕궁에서 쫓겨나고 왕자들은 밤이면 백조로 변하여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밖에는 살 수가 없다. 엘리자 공주는 백조왕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넜다가 한 요정의 도움으로 왕자들에게 쐐기풀 옷을 지어 입히면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신에 옷을 다 지을 동안에는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을 겪든 절대로 입을 열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칼이 되어 11명의 왕자들의 가슴에 가 박히고 왕자들은 죽게 된다. 공주는 밤낮으로 쐐기풀을 뜯어다 발로 밟아 실을 잣고 맨손이 넝마가 되도록 가시에 찔려가며 옷을 만든다. 그 모습을 본 지나가던 임금님의 구애로 공주는 왕비가 되고 임금님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는 그에게 아무 말도 전할 수가 없다. 대신에 더 열심히 백조 왕자들의 옷을 짓고 쐐기풀을 구하기 위해 무덤가로 몰래 들어가는 기행까지 벌이게 된다. 공주로서는 두려움을 무릅쓴 용기였으나 그녀를 미행한 임금님과 대신은 공주를 마녀로 오해하게 되고 그녀는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라이프 오어 데스는 동화가 아니다. 오디 파머라는 이 이름부터가 점진적 인내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한 남성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싶은 이야기이다. 제목 그대로 죽음과 삶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생의 고통과 고뇌로 주인공을 진탕시키는 이 범죄 스릴러물을 앞에 두고 왜 계속 엉뚱한 동화 얘기냐고 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소설이 시작하는 그 첫 장,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관통하여 이야기의 끝까지 치달아 오르는 엘리자 공주의 이미지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찔레덤불을 헤치는 장면(p8) 때문일 수도 있고, 수영을 하지도 못하면서 호수를 건너는 그 용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공교롭게도 오디의 삶이 구제되기까지의 기간이 "11"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요다와 부처와 검투사를 한데 합쳐 버무려 놓은 존재(p44) 같은 오디의 정체성이 내가 미루어 생각했던 엘리자 공주의 성격과 일치했기 때문인지도. 어째됐든 그러한 사정으로 나는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틀림없이 그에게 저주를 건 누군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틀림없이 그가 구해야만 하는 백조 왕자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엘리자와 왕자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마녀의 저주에 걸렸던 것처럼 오디의 인생에도 저주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사건이 찾아왔고, 엘리자가 무덤가의 쐐기풀을 뜯었다는 이유로 마녀로 오해받아 사형을 언도받은 것처럼 오디 또한 은행 강도 털이범으로 사람을 죽인 살인범으로 감옥으로 가야했다. 산산조각나 간신히 이어 붙인 머리를 안고서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오디는 검사단이 들이대는 모든 죄를 떠안아야만 했다. 7백만 달러라는 어마무시한 돈을 숨겼다는 오해까지 등에 써붙이고서 말이다. 마녀의 저주를 풀기 위해 가시 가득한 쐐기풀을 뜯고 밟고 자아 11벌의 옷을 지어야 했던 엘리자처럼 오디 또한 11년을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감옥 안에 있는 절반의 인구가 돈 때문에, 누군가의 사주로 10년에 걸쳐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탈옥 후 1년, 도망과 추격 그 그림자 속에서 또다시 웅크린 잠을 자야했다. 다시금 생을 걸어야 했다. 그럼에도 엘리자처럼 오디 또한 마지막 그 순간까지, 마법이 풀려야만 하는 그 지점의 그 사람의 앞에 서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에 인내하며 평온을 유지했고 이타적으로 타인을 도왔다. 사형을 언도 받고도 사랑하는 남자에게 한 마디 말조차 하지 못한 채로 남은 쐐기풀로 왕자들의 옷을 자아내는 것에 몰두했던 공주님과도 같이 오로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켜야 할 약속 하나만을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엘리자의 인생에 요정이 있었던 것처럼 오디의 인생에도 요정 같은 많은 인연들이 등장한다. 감방 동료 모스와 틴에이저 같은 체구의 특수요원 데지레. 살인범의 멍에를 짊어진 아들을, 동생을 여전히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나. 그 밖에도 소소한, 그러나 가슴 아픈 사연의 인물들이 등장했고, 이 인연들의 가장 최초라 할 수 있는 자리에 뜨겁게 사랑한 여인도 존재했다. 오디라는 남자 그 자체의 매력도 컸지만 자칫 지나치게 침착하고 선하고 외곬이라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는 오디를 주변 인물들이 얽히고 섥혀 만들어 내는 앙상블로 조금 중화시켜 주지 않았나 싶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남자의 쉽게 토해지지 않는 비밀들에 숨통을 틔워줬달까. "라이프 오어 데스"도 여느 범죄 스릴러물과 마찬가지로 결말로 갈 수록 점점 더 재미나고 점점 더 흥미롭고 점점 더 긴장감이 높아져 갔는데 백조 왕자와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이라면 동화를 읽으면서는 울지 않았던 내가 라이프 오어 데스의 결말 앞에서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프 오어 데스를 보며 나는 총 세 번을 울었는데 세 번 다 에필로그를 보면서 울었다. 에필로그 한 번 볼 때 울고 곧장 앞페이지로 쭉 돌아가서 다시 한 번 더 보면서 울고 리뷰 쓴다고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가 또 한 번 읽으며 울었다. 뜨거운 사랑과 가족애와 우정과 의리가 빛나는 이야기 앞에서는 도무지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멋진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백조 왕자, 계몽사판 야생의 백조 결말은 다음과 같다.
엘리자는 사형 집행일 수레를 타고 도끼를 둔 사형수 앞으로 끌려 가면서도 쐐기풀로 옷을 짓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포기할 수가 없다. 그 순간 일년 만에 그녀의 형제들, 백조로 변한 11명의 왕자들이 그녀의 수레로 날아온다. 엘리자는 백조들을 향해 11벌의 쐐기풀 옷을 날려보내고 백조들은 그 옷을 머리에 씌우며 사람으로 변신한다. 그제서야 엘리자는 임금님에게 그간의 진실을 말하여 오해를 풀고 11명의 백조왕자와 임금님과 함께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아간다. 아참참, 쐐기풀 옷 중의 한 벌은 팔이 채 완성돼지 않았던 탓에 백조 왕자 중의 한 명은 여전히 날개를 달고 있다. 오디의 시작부터 백조왕자를 떠올렸던 나로서는 동화의 결말과 라이프 오어 데스라는 이 걸출한 스릴러물의 결말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하튼 두 이야기의 결말이 다 나에게는 긴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