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이여.
어디로 향해 가는가?"
_936-937절, 테세우스
테세우스의 후처 파이드라.
그녀는 유명한 여자의 딸이며
거듭 유명한 여자의 자매이다.
어머니 파시파에는 황소를 사랑해
장인이 만든 암소의 인형에 몸을 던졌고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
자매인 아리아드네는 어떠했는가.
테세우스에게 반한 아리아드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궁을 탈출할 방법을 알려준다.
아리아드네의 실은 테세우스의 운명은
태양 아래로 이끌어주었지만
아리아드네의 운명은 낙소스에
홀로 버려지게 만들었다.
언니를 버린 이제는 늙어버린
남자 테세우스의 후처가 된 파이드라는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매가 그러하였듯이
사랑해서는 안될 존재
의붓아들 힙폴리토스를 사랑하게 된다.
그것이 힙폴리토스를 향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저주였다.
장차 인간이 받을 고통보다
자신이 당한 수모가 훨씬 뼈아팠던 여신의
현명하지도 적절치도 못한 안배.
어쩌면 그런 것이 운명이고 인생인가 보지.
꼭 여자를 통해 아이를
낳게 할 필요가 있었느냐며
아이가 제 값 주고 사올 수 있는
종자 같은 것이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신을 원망하는 순결한 힙폴리토스는
그냥 너무 애 같아서 할 말이 없다.
"누가 순결할 줄 아는 방법을
저들에게 가르치게 하거나
아니면 내가 항상 저들을
짓밟아 버리는 걸 허락하여라."
이건 과연 누구의 입에서 나와야 할 대사였을까?
딸 같이 키운 파이드라의 짝사랑을
보다 못한 유모가 그 마음을 전하였기로서니
말로 온갖 모욕을 가할 자격이 그에게 있었냔 말이다.
그들이 힙폴리토스를 내다팔거나 겁탈이라도 했기에?
정작 애욕의 신이라며 아프로디테를
무시한 건 힙폴리토스가 아닌가.
딸을 정략의 재물로써 내어주고
딸뻘의 어린 여자를 정략의 증거로써 눕힌 건
미노스 왕과 테세우스가 아니었는가 말이다.
저 두 아비와 저 광오한 아들이 없었다면
하늘 아래 둘은 만날 일조차 없었을지 모르는데.
의심의 증거를 뿌리고 자살한 이는 파이드라이나
최소한의 조사조차 하지 않은 채
아들에게 포세이돈의 저주를 뿌린 이 또한
아비 테세우스이건만
누가 누굴 짓밟아야 한다고?
제목은 힙폴리토스지만
극은 어디까지나 파이드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스로마 신화로 이야기를 접했을 때와는 달리
파이드라도 메데이아와 마찬가지로
아주 악녀처럼은 느껴지지가 않았다.
알케스티스도 헌신의 화신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는
이런 점이 함정이라면 함정인데
그 함정 빠져빠져 모두 빠져버려.
매우 매력적이니까.
헤라의 열 두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길을 지나다가 아드메토스의 집에 들린
헤라클레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화관을 머리에 쓰고
흥청망청 술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다.
술 마시고 처자식 다 죽이더니
잘하는 짓이라고
누군가는 비꼴 수도 있겠으나
비극인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가끔은 내 머리를 꽃밭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꽃 같은 낙관, 웃음 한 송이도 없이
이 험난한 인생과 운명을 어떻게 버텨내겠는가.
헤라클레스가 그랬듯이 우리도 가끔은
술잔을 들고 화환을 쓰자.
죽음이란 항구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 을유문화사 지원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