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공화국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평점 :
절판


어느 때부턴가 찔끔찔끔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한 32명의 아이들.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구쳤는지 알 수 없다. 누구는 폭이 4키로는 되는 흙빛 에레강이 아이들의 발원지 같다고 하지만 (장난하냐? 진심 SF로 착각했다고요ㅠㅡㅠ)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말이라 화자인 "나"뿐 아니라 주민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나는 믿었다, 어쩔래?) 다들 쉬쉬 하지만 납치되어 밀림에 갇혀있던 아이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을까? 부끄럽게도 산스크리스토발에서 벌어졌던 대량 유괴가 처음도 아니니까.

아이들이 처음부터 난폭했던 건 아니다. 아홉 살에서 열세 살 즈음으로 보이는 녀석들은 네다섯씩 떼를 지어 다니며 장난을 치며 놀았다. 뗏국물이 흐르는 묘하게 눈길이 가는 모습으로 구걸을 하고 동정을 샀다. 그러나 갈수록 좀도둑질의 빈도수가 늘어났다. 손에 들린 쇼핑백 같은 걸 대놓고 갈취해 가는 모양새였다. 한 어린애는 대낮 길거리에서 경찰의 총을 훔치려 들었는데 이를 저지하던 경찰과 아이들의 소동 때문에 사망 사고마저 발생한다.

시장은 이 사건의 원인이 거리의 아이라는 사실을 숨긴다. 사회복지 따위 애저녁에 말아먹은 동네라도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는 여론의 손가락질과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테니까. 그러나 경찰 한 명의 사망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마트를 털던 아이 하나가 경비원에게 붙들려 폭행 당한다. 좀도둑질에 대한 보복이라기엔 지나친 폭력이었음에도 주변 어른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던 사건. 아이들도 얌전히 물러가며 꺼림칙하긴해도 단순 헤프닝으로 일단락이 나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마트 앞이 아이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저마다 놀이에 열중한 것처럼 보이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마트를 짓쳐들어왔고 그 중 몇 몇은 손에 쥐고 있던 칼로 어른을 찌르기에 이른다. 시장 권한으로 파묻을 수 있는 류의 사건이 아니었기에 도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경찰은 밀림으로 달아난 아이들을 쫓아 대대적으로 수색에 나선다. 금새 체포될 줄만 알았던 아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에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고작해야 어린 아이들이 밀림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루? 이틀? 진초록 그림자들 사이에서 굶주리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어른도 있지만 대개는 아이들을 찾는데 적극적이지 않다. 그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아니니까. 어쩌면 위험 요소가 사라진 거리를 다행이라고 생각한 어른들이 더 많았을지도. 그 같은 안심을 비웃듯 도시의 아이들마저 실종되기 시작한다. 비명을 지르는 부모들과 한데 모여 아이들을 찾아나선 어른들, 그들은 과연 존재의 그림자마저 지운듯 고요하게 숨어버린 아이들과 만날 수 있었을까?

32명의 아이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22년 전 갓 새신랑이 되어 마냥 행복하기만했던 한 사회복지과의 젊은 공무원이 산스크리스토발로 발령 받아 경험한 미스테리한 사건을 기록했다. 빛의 공화국에서 아이들은 어른과 (=화자) 소통하지 않는다. 독자들과도 단절되어 있다. 32명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언어를 쓰고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한 탓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무얼 할 작정이었는지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이들이 등장하지만 모험소설도 성장소설도 아니라는 이런 기묘한 장르감각,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선연한 공포와 환상 같은 유리 조각들의 빛만을 남긴 채로 아이들은 이야기와 함께 어딘가에 묻혀버렸다. 유일하게 말로써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었던 아이 또한 침묵을 택한 채로 끝내 잠적해 버렸으니 우리는 그때도 지금도 어른인, 그것도 공무원인, "나"의 입을 통해서만 빛의 공화국의 목격담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오해하기 충분하고 추측하기엔 빈약한 단서들을 짜맞춰가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운명을 정하는 것인 반면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다."(p37) 산스크리스토발의 아이들은 그들끼리가 아니면 누구의 이름도 불러주지 않았다. 산스크리스토발 아이들은 그들끼리가 아니면 세상 어떤 이의 말도 듣지 않았다. 빛의 공화국이 맞게 되는 파국을 목도하고 싶다면 당장 페이지를 펼쳐보자. 책에 더 많은 독자가 귀기울이면 누군가는 32명의 아이들이 중얼거리며 나누던 대화와 이야기들의 비밀도 밝혀낼 수도 있지 않을까?



<현대문학 지원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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