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의 집
TJ 클룬 지음, 송섬별 옮김 / 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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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아동관리부서(DICOMY)가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저 바로 노동청 신고 들어갔어요. 점심시간 15분?! 장난쳐요? 14개 26열로 다닥다닥 배열된 칸막이도 없는 책상에 개인 물품 절대 엄금이라니 직원은 뭐 코도 풀지 말란 건가요? 와이셔츠에 묻은 소스 하나까지 벌점을 매기는 관리자는 인권 말아먹은거죠? 구백쪽 훌쩍 넘는 DICOMI의 <규칙 및 규정집>은 제 손에 들어오는 즉시 불쏘시개로 쓸 용의가 아주 만만입니다. 이런 곳에서 자그마치 17년이나 근속해온 주인공 라이너스 베이커씨를 따뜻한 손길로 맞아주세요. 낯선 독자를 만나느라 긴장으로 손에 땀이 좀 찼겠지만 까짓 닦으면 그만이지! 살이 쪄서 동글동글한 몸매도 보다 보면 귀엽다니까요. 생전 처음 만나는 머리가 벗겨진 퀴어 로맨스 주인공에 흠칫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도 처음 읽을 때 얘기구요. 라이너스를 사랑하게 된 이제 와선 괜찮아! 짝!! 괜찮아! 짝!! 라이너스가 반질반질 대머리가 되도 그는 저의 최애 주인공입니닷!!

마법아동관리부서 최고 경영진의 명령으로 라이너스는 한달 동안 4급 기밀 지역인 마르시아스섬의 고아원으로 시찰을 나갑니다. 생전 처음 보는 바다에 감격한 것도 잠시 그는 고아원에 관한 보고서를 읽자마자 기절해 버려요. 원체 얌전하고 소심한 성격의 라이너스에게는 적그리스도의 아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꽤 커다란 충격이었는가 봅니다. 후덜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고아원에 발을 들인 그의 앞에 온갖 독특한 마법 아동들이 등장합니다. 온세상을 멸망시킬 힘을 가진 악마의 아들 루시(퍼), 하얀 턱수염을 가진 263세 노움 소녀 탈리아, 단추를 좋아하는 와이번 시어도어, 겁에 질리면 강아지로 변하는 샐, 짙은 흙냄새를 풍기는 숲 정령 피, 불분명한 형태의 초록색 덩어리(이를테면 슬라임 같은?) 촉수 아동 천시, 그리고 이 모든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원장 아서 파르나서스와의 만남은 라이너스의 삶을 지난 40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인도해 가기 시작해요.


아서와 여섯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라이너스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처절하게 외로우면서도 본인이 외롭다는 사실조차 자각을 못하는 남자였거든요.벽에 바른 페인트 같은 존재감과 내향적 성격, 게이, 과체중, 끊임없는 다이어트, 진 빠지는 직장생활에 치여 기운이 쏘옥 빠져있었던 탓인지도 몰라요. 라이너스는 자신의 욕망에 무관심했고 자신을 향한 부당한 시선이나 대우에도 저항한 적이 없었지만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비난에 갇혀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차츰 섬의 어른들과 DICOMI, 그리고 세상에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애초에는 고아원을 폐쇄할 작정으로 차출된 사례연구원이었지만 라이너스는 이제 최전방에서 마르시아스섬의 고아원과 아서, 아이들을 지키는 어른이 되어버렸답니다.

주인공이 그가 가진 정체성을 이유로 공격을 당하는 걸 보면 너무너무 화가 나고 속상한데요. 편견에 무너지지 않고 저항하고 성장하며 그 와중에 사랑까지 키워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말도 못하게 뿌듯해져요. 그게 설령 창백한 피부에 짙은 팔자주름을 가지고 스쿠터 타이어로 쓸만한 뱃살을 가진 정수리가 비어가고 있는 마흔살의 아저씨라도요. 그 아저씨가 사랑하는 또다른 아저씨의 천진난만한 미소와 껑충한 키, 짱뚱한 바지에 왜 저까지 설레는지 모를 일입니다. 여섯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일주일에 꼭 하루는 섬의 숲으로 모험을 떠나고 싶었구요. 콘 가득 체리맛 아이스크림을 쌓아 한움큼 베어 먹고 싶기도 했어요. 따뜻한 햇살과 바닷바람이 쏟아지는 창을 열고 느지막히 깨어나는 바닷가의 휴가도 내년에는 꼭 이루고 말 거에요. 소년 혹은 소녀 혹은 여성 서사의 성장소설만 좋아하는 독자였는데 <벼랑 위의 집>으로 정말 마법 같은 취향을 깨쳤습니다. 오해와 편견의 등짝을 차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넓은 품으로 지켜내는 라이너스, 그의 사랑스럽고 희망차고 모험 가득한 따뜻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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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버스가 늦게 오면 걱정합니다.

알람을 못 듣고 잠을 자면 걱정하고요,

주말에 가게에 갔는데 아보카도 값이 너무 올랐을 때 걱정을 하죠,

걱정이란 이런 거라고요, 파라나서스 씨."

"그런 건 걱정이 아니라 일상이지요."

파르나서스가 부드럽게 그의 말을 고쳐주었다.

"평범한 삶의 덫이죠."

(p239)



<든 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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