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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
에발트 프리 지음, 소피아 마르티네크 그림, 손희주 옮김 / 동아엠앤비 / 2021년 9월
평점 :
아프리카, 바빌론, 바리가자, 갠지스, 장안, 비잔티움, 시데바이, 모체 계곡, 테노치티틀란과 쿠스코, 킬와, 샤자하나바드, 카프 프랑세, 아메리카, 훗카이도,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타호, 카이로까지. 서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도시들의 편에 서서 역사를 방대하게 돌아보는 책이다. 508 페이지의 어마어마한 분량이지만 한순간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재미나게 읽었다. 문제는 내용이 너무 방대해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는거;; 근사한 통찰력과 혜안으로 줄기를 쑥쑥 뽑아내서 큰 나무 같은 리뷰를 쓰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소소하고 지엽적이지만 내딴엔 흥미로웠던 내용만 추려 못자리판에 볍씨 뿌리듯 흩뿌리며 썼다. 리뷰는 지루해도 책은 안지루하다는 걸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한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는데 누군가는 이런 걸 궁금해하는구나 신기했다. 누가 최초로 큰 바다로 나가려고 했을까? 최초의 인간은 누구이며 역사는 언제 시작했을까?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은 폭력적인 다툼의 결과였을까? 그들은 멸종에 얼마만큼의 고통을 느꼈을까? 다른 한쪽은 승리자의 기쁨을 누렸을까? 하와이 원주민은 왜 제임스 쿡 선장의 신체를 조각내고 살만 발라 선원들에게 돌려주었을까?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가장자리에 낯선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역사에 무지해 처음 만나는 이야기도 많았다.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며 집중적인 모유 수유가 내는 자연적 피임 효과가 약해졌다. 여성은 더 자주 임신하고 출산했으며 사냥꾼과 채집자 시절이던 때보다 더 많은 아이들을 잃었다. 6세기 무역망에서 인도양의 상인과 선원들은 서로마 제국의 후예들을 야만인 취급했다. 문화도 모르며 돈을 낼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단길을 생각할 때 우리는(어쩌면 나 혼자?) 상인들이 한 번에 지나가는 긴 육로를 떠올리는데 실제로는 중간마다 상품을 매매하거나 옮겨 실을 수 있는 시장과 시장 사이의 구간으로 되어 있었다. 카스트 제도가 있어 인도의 사람들은 기원전 500년도 전부터 자기가 어디에 속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진로탐색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삶은 어쩌면 뜻밖의 안정감을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측천무후에 대한 부정적 서술만 보면 무조(본명)의 집권이 시대의 정체 내지는 퇴보를 낳았을 것 같은데 후대 역사가들의 평에 따르면 그녀의 치세가 중국 전체 역사의 흐름에 해를 끼친 일은 없다고 한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당태종과 비교해 무조가 특별히 더 잔인한지도 모르겠다는데 동의 한 표. 안사의 난이 안사 + 사사명의 난인 줄을 왜 때문에 나는 처음 알게 됐을까? (공부를 안해서ㅠㅠ) 유목민을 사냥꾼과 채집가의 분류 안에 넣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다. 떠돌아다니니까 다 비슷한 걸로 생각했지만 유목민은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르는 식량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옮겨다니는 것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긴가민가;;) 13세기 몽골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전세계의 말 중 절반이 중앙아시아에 서식했다. 반대로 당나귀는 유목민을 통해 서양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포르투칼 인들이 브라질 나무가 자라는 땅에 브라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남미와 북미에 대한 약탈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으나 (역시 공부를 안해서ㅠㅠ) 북미는 약탈자들의 눈에 가치가 없어 보여 남미에 비해 관심을 덜 받았으며 본격적인 수탈이 시작된 건 유럽내 종교갈등이 심화되면서부터였다. 15-17세기까지 아프리카를 노예 경작지처럼 다루었던 서유럽인들이 18세기에는 노예제도 금지로 노선을 틀었다. 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을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서아프리카의 노예 가격은 내려갔다. 그러나 노예제가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아프리카 내의 폭력 사업가들에 의해 노예 사냥꾼과 노예 장사꾼의 규모는 줄지 않았다. 19세기, 서유럽은 이제와 노예제도가 개화되지 못한 나라들의 끔찍한 장치라며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가는 이런 주장이 주제넘는 일이라 말하고 독자도 어이가 없어 입틀막. 쟤네들 숨틀막 하고 싶다😠😡
아이티에는 흑인 나폴레옹이라 불리던 투생 루베르튀르가 있었다. 생도맹그의 노예들은 백인의 시대가 영원히 지나갔다는 사실을 아이티라는 새 이름으로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티의 해방은 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노예 해방으로 촉진되지 못했는데 달아난 농장주와 소유주들이 노예 해방이 혼란과 폭력, 경제의 파괴를 불러온다는 견해를 퍼트린 탓이다. 18세기 유럽인들은 더 맛잇는 음식, 더 아름다운 가구, 커피와 설탕 등의 기호품을 사기 위해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이를 "근면 혁명"이라 부른단다. 멕시코는 1824년부터 1857년 대략 30년의 기간 동안 16명의 대통령과 33개의 과도정부를 겪었다. 국사 공부에 어려움을 겪을 멕시코 학생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이미 남성의 절반이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여성은 10프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글을 읽었다. 교토와 오사카에 각 500명의 출판업 종사자가 있었고 1832년 에도만 헤아려도 대력 800곳의 책 대여점이 존재했다고 한다. 여행책자, 점성술 책, 배우와 운동 선수의 순위에 관한 책, 광고 책자가 그 시절부터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세계사에서도 독보적인 출판 강국이었구만;; 1892년 마크 트웨인은 베를린을 두고 "마치 지난주에 지어진 듯한 인상을 풍긴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하인들이 자기 신념대로 기독교와 유대교를 믿는 것을 허용했다. 이슬람이 해답이라며 현재와 같은 극단적 배타성, 폐쇄성, 보수성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인 듯 하다🙄😣
서기 500년 경의 그리스 세계가 역사, 철학, 신화로 매력 뿜뿜인 것과는 별개로 그곳이 정치적으로는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는 거, 서유럽을 그리스 지식의 직계처럼 느끼며 숱한 문서들을 보관하는 창고처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무슬림의 사서들이 로마와 그리스의 전통을 계승, 발전, 보존했으며 이후 스페인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을 통해 중세 서유럽의 수도원 도서관에 전달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미요가 바티칸의 교황청 자료실에서 발견했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판본들도 어쩌면 그런 식으로 수집되고 보존 됐던걸까?😄😆
로마 시대 용병집단을 군수회사로 표현하고 퇴위 당한 황제에게 지급한 돈을 퇴직금이라 말하는 등 표현들도 재미나다. 고고학자들은 무덤의 매장품을 전체 세트로 갖고 싶어했다는 문장도 공감이 가 우스웠는데 그들이 약탈꾼으로 돌변해 유물을 본국으로 빼돌렸을 걸 상상하니 곧 아찔해졌다. 유럽인을을 "살인적이며 단지 포획물에만 눈이 먼 고도로 발달한 야만인"이라고 말하는 점도 싫지 않았다. 솔직히 사실이지 뭐;; 아쉬운 점은 한국의 역사를 세계사 속에서 입체적으로 만나볼 수 없다는 정도일까? 훗카이도 편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로 잠시 잠깐 조선이 등장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편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새로운 분쟁의 전선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고 딱 한 줄로 표기된다. 카이로의 인구수를 설명할 때도 대한민국의 서울에 약 2400명이 살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역시 한 줄, 쬐끔 아쉽다. 언젠가는 한국의 역사도 세계의 독자들에게 공유될 수 있었으면. 그 전에 나부터가 국사책 좀 읽어야겠지?😍🥰
#동아엠엔비 지원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