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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평점 :

"1961년 도쿄 출생.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연극과 졸업", 엇? 마루야마 마사키, 젊은 작가가 아니었군요. 낯선 이름에 작가님 작품을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처음으로 만나 혜성처럼 등장한 90년대생 작가님인 줄 알았어요.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 중 첫 권인 <데프 보이스>로 데뷔하셨고 이후 <표류하는 아이>, <형사 이즈모리의 고고한 얼굴>, <원더풀 라이프>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마쓰모토 세이초 상 최종 후보에 오른 <데프 보이스>일텐데요.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를 첫권부터 읽을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제일 최신작부터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굳이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부제 '너는 너대로 괜찮아' 입니다.
제 1장.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귀가 들리지 않아요, 119에 신고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요!”
_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p69
한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습니다. 농인이 112에 신고하고 119를 부르는 방법에 대해서요. "농인 112"로 네이버에 검색을 하고 2017년의 기사를 읽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에도 긴급영상통화 시스템이 있고 이를 위한 수화통역센터가 운영 중이라는 사실을요. 야간 근무조가 없어 응급 상황시 이에 대처할 인력이 부족하니 많은 지원을 바란다는 농아인협회의 요청은 받아들여졌을지, 이래저래 기사를 찾았지만 눈에 띄는 내용은 없더라구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를 읽지 않았다면, 수화 통역사 '아라이 나오토'와 만나지 않았다면 저란 독자는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영영 눈을 감고 살았을 겁니다. 소설에서 농인 임산부가 아이를 잃는 모습을 봤어요. 의도된 설정이라지만 응급대원의 "왜 더 빨리 신고하지 않았냐"는 말에 "신고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왈칵 소리 지르는 아라이의 말이 돌처럼 얹혔습니다. 구급차를 부르는 일조차 아라이 같은 통역사를 거쳐야 하는 농인들의 불편함. 생존과도 직결된 이런 위기에 대해 어쩌면 조금도 몰랐을까요? 많은 시간이 흐른만큼 농인들을 위한 SOS 시스템이 충분히 개선되었기를 바래봅니다.
제 2장. 쿨 사일런트
“너는 너대로 괜찮아.”
_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p141
잘생긴 외모에 농인이라는 사연, 어딘지 섬세하고 우아한 수화로 화제를 모아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HAL. 아라이가 맡은 이번 의뢰는 HAL의 기자간담회 통역입니다. HAL은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드물게 '거의' 완벽한 구화를 해요. 상대가 입으로 말하면 나도 입으로, 상대가 수화로 말하면 나도 수화로, 좋게 말하면 융통성 있게 대응하며 성장한 셈이지만 사실 HAL은 농인쪽에도 청인쪽에도 완벽히 속하지 못한 자신의 세계에 불안감을 느껴요. HAL은 농인 스타로써의 자신의 위치에도 책임감을 느낍니다. '제 2의 HAL, 제 3의 HAL이 나왔으면 좋겠다.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농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고 지원도 늘기를 바란다.' 그런 각오를 밝히며 아라이에게 과외를 요청하기도 하구요. 수화의 수준도 나날이 늘었는데 이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방송국 놈들요. HAL의 수화가 너무 수다스러워졌다는거죠. 멋지지도 폼나지도 않은 수화는 접으라면서 농인의 위치에 걸맞게 구화도 삼가라네요. 정체성을 찾아 성장 중인 HAL에겐 너무나 가혹한 요구라 맘이 아팠어요. 얼마전 BTS의 수화 안무에 WTO 사무총장과 농인들이 감사 인사를 전해 화제가 됐잖아요. 수화로 노래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한 마음이었는데 HAL도 방탄 노래를 들으면 기쁘지 않았을까, 같이 노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들을 수 있는 청년도 들을 수 없는 청년도 모두 멋지게 날아올라 꿈을 펼치기를 바랍니다.
제 3장, 4장은 비밀
“오늘도 좋은 하루였네요. 내일도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_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p216
제가 다 말해버리면 재미없으니까 줄거리는 여기까지. 가정을 이룰 수 없는 남자로 보였다는 아라이 나오토. 그가 3권에서는 아내도 있고 딸도 있는 유부남으로 변신합니다. 주부와 다름없는 마음가짐으로 딸 미와를 돌보고 아내 미유키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라이와 주변인물들이 기억하는 아라이의 간극이 커서 신기했어요. 전편에서는 꽤 삭막하고 벽이 두터운 남자였나보지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농인이었던 아라이는 자식을 낳는데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미유키의 적극적인 요구에 응해 히토미를 낳습니다. 히토미는 걱정대로 '들리지 않는 아이'였구요. 1장에서 4장까지 각기 다른 사건들을 통과하며 아라이는 청각장애를 가진 자식을 둔 아버지로서, 함께 딸을 키워야 하는 아내의 파트너로서, 장애아인 동생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정에서 혼란을 느끼는 큰딸 미와의 버팀목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줘요. 농인 부부의 아들, 농인 형의 동생으로 살 때만 해도 세상사에 비껴있었다는 그는 새로운 가족을 위해 벽을 낮추고 세상과 농인의 소통을 위해 분주하게 뜁니다. 그런 그를 뒤쫓으며 듣게 된 소수자의 말들을 잊지 않을게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를 시작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황금가지 지원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