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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현대문학 지원 도서입니다
"따가운 굴욕의 눈물이 눈알 뒤쪽에 맺혔다.
소년은 자기를 이따위로 대접하면 안 된다고 그들 모두에게 소리치고 싶은 맹렬한 충동을 느꼈다.
자기는 살인자이며, 살인을 저지르고도 잡히지 않을 수 있다고 소리치고 싶은 광적인 충동을 느꼈다."
(브라이턴 록, p361)
영국의 휴양도시 브라이턴 룩. 런던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브라이턴으로 성령강림절의 휴가를 즐기려는 인파들이 쏟아진다. 초여름의 신선한 공기, 눈부신 햇살, 즐거움을 찾아 밖으로 나온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프레드 헤일만이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물어 뜯으며 불안정하게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브라이턴의 갱단, 콜레오니에게 또다른 갱단 카이트의 정보를 팔아왔고 급기야 카이트는 살해 당했다. 카이트의 뒤를 이은 핑키와 남은 패거리는, 오합지졸임에 분명하지만, 신문기자인 헤일 정도야 어쩌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려는 생각으로 안전한 장소, 곁에 있어줄 사람을 찾는 헤일의 눈에 그녀가 들어온다. 아이다 아널드, 화통하고 친절하고 정이 많은 여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재미있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데 하필 시간도 많다. 그리하여 데이트라고 할 수도 없는 잠깐의 만남 후 헤일이 사망했을 때 유일하게 그의 사인을 의심하고 핑키와 그 패거리를 추적한다.
완전범죄. 17세 소년 핑키의 첫살인은 완벽했다. 부검은 헤일의 사망을 심장마비로 진단했고 경찰은 이에 어떤 의구심도 갖지 않았으며 신문사는 발빠르게 직원의 명복을 비는 기사를 싣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유일한 흠은 헤일의 사망시간을 확정하기 위해 만든 알리바이가 동료인 스파이서로 인해 깨졌다는거다. 헤일이 일정표대로 움직이며 브라이턴에 뿌려야 하는 신문사의 이벤트, 일종의 보물찾기 카드 같은 것을 스파이서가 식당 테이블 밑에 숨겼는데 직원인 로즈가 그걸 보게 된다. 브라이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이벤트인데다 신문에 헤일의 얼굴까지 실린 마당에 자칫 종업원이 두 사람의 얼굴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보면 어떻게 될까? 핑키는 로즈를 만난다. 곰팡이처럼 번진 가난의 얼룩으로 뿌리까지 주눅든 시시한 소녀. 핑키는 로즈를 경멸하지만 입막음을 구실로 친구, 연인, 순식간에 남편의 자리까지 차지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로즈는 핑키를 사랑한다. 한번의 관심, 한번의 데이트만으로 핑키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을 키우고 그가 살인자란 사실마저 덮는다.
이로써 안심이냐고? 설마;; 조금의 위험도 감수할 생각이 없는 핑키에겐 부하인 스파이서도 변호사 프리윗도 무엇보다 숨이 붙은 채인 로즈와 사냥개처럼 제 뒤를 추적하는 아이다 모두가 위협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죽여야만 이 일이 끝이 날까? 핑키는 피로한 머리로 생각하며 스파이서와 프리윗과 로즈를 해치울 계획을 세운다. 허술한 난간 밖으로 스파이서를 떠밀고 얼마간의 돈을 쥐어 프리윗을 떠나 보낸다. 결벽증을 무릅쓰고 간신히 첫날밤을 보낸 후엔 동반자살을 하자며 로즈의 손에 권총을 쥐어준다. 한번 선을 넘은 그에게 두 번, 세 번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선을 넘은 모두가 단숨에 악에 정복 당하지는 않는다는데 있다. 댈로는 핑키가 저지른 두 번의 살인에 가담했지만 무해한 소녀의 살인까지는 방관하고 싶지 않았다. 경찰의 사이렌 소리, 댈로의 사죄, 포기를 외치는 아이다, 자살하지 않은 채로 어딘가에 총을 던져버렸다고 말하는 로즈, 절벽 끝에 내몰린 핑키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현대의 잔혹한 추리 혹은 스릴러에 웬만치 익숙한 독자라 악의 본성을 탐구하는 책 치고는 꽤 순한 맛에 초반엔 살짝 당황했다. 생각해 보면 1938년도 작품인 것이다. 20세기 스토리텔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찬사까지 듣는 양반인데 얼마나 많은 후배들이 그의 작품을 모방했겠는가 말이다. 여타 고전 반열에 든 소설들처럼 익숙해서 평이하게 느껴지는 함정에 빠졌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실상은 결코 평이하지 않으며 순한 맛 뒤에 탁 치고 올라오는 얼얼하게 매운 맛이 아주 장난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반전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내용인데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결말. 당시의 반향도 장난 아니었는지 영화를 제작할 때 그레이엄 그린이 직접 시나리오를 수정해 결말을 바꾸기까지 했단다. 아니 내가 관객이라도 결말이 이러면 멘탈 찢어지지 진짜 ㅋㅋㅋ 핑키를 뒤쫓는 아이다가 주인공일 줄 알았는데 이건 살짝 페이크고 찐은 10대 폭력배 핑키 그리고 그의 어린 신부 로즈라는 거. 브라이턴 록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인 쿳시(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작가)의 해제도 빼먹지 말고 꼭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