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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의 환상 이야기
이디스 워튼 지음, 성소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3월
평점 :

레인보우퍼블릭스 지원 도서입니다
이디스 워튼의 단편 <로마의 열병>을 읽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이 작가님 미스터리한 소설 내지는 범죄물을 쓰셔도 참 좋으셨을 것 같은데 안타깝다 하구요. 친구지만 경쟁자, 한 남자를 두고 물밑 다툼을 벌이며 오랜 시간 우정 아닌 우정을 나눠온 중년의 두 여성이 발코니에서 벌이는 예의바른 신경전이 정말 후덜덜 했거든요. 진실을 토하고 의기양양 돌아서는 친구의 뒤를 쫓아가 화분이나 벽돌로 내리치면 이건 바로 스릴러!!! 라고 생각한 기억이 여태 또렷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딕풍, 환상, 미스터리 소설에서 충분히 재능 발휘를 한 작가님이더라구요.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해서 순문학만 쭉 써오신 줄. 전 대체 뭘 안타까워 한 거죠?? o(* ̄▽ ̄*)ブ
<귀향길>
신혼의 부부. 사랑의 단꿈은 너무나 짧아 남편은 치료할 길 없는 병증에 시름시름 말라가고 아내는 지쳐갑니다.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의 요양 때문에 콜로라도에 머물러야 하는 게 싫습니다. 그에게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보호자 역할을 해야한다는 사실도 그녀를 힘들게 해요. 퀭하게 말라가는 남편의 몰골을 낯선 동물 보듯 관찰하는 일에는 스스로도 소름이 돋구요. 그러던 어느 날 의시가 진단합니다.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완치가 아닌 사망 선고인 그 진단에도 아내의 마음은 기쁨으로 두근두근 뛰어요. 얼른 집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품으로! 남편의 죽음이 뒷전이라기 보다 소소한 나의 행복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마음인거겠죠? 부부가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싶었는데요. 과연 무슨 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작가였어요. 남편이 침대칸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망해 버리거든요. 그 어떤 낌새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조용히 떠날 수 있을까 싶게 그렇게 죽어 버려요. 아내는 남편이 사망했단 사실보다 남편의 시체와 함께 승강장에 내려져 곧장 고향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을 숨기기로 했으니 과연 아내는 남편의 시체와 함께 무사히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기도하는 공작부인>
젊고 아름답고 공작부인. 책 속에 파묻혀 아내를 방치하는 공작. 그리고 그의 강인하고 잘생기고 기운 넘치는 사촌.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파란만장한 삼각관계겠다 싶었는데 와, 이건 상상을 넘어서잖아요. 아내와 사촌이 지나치게 가깝게 지낸다는 걸 느낀 탓인지 공작은 사촌에게 축객령을 내립니다. 멀리 보이는 애인의 성을 보며 공작부인은, 또 사촌은 얼마나 애면글면 했을까요? 그래도 공작이 아내에게 딱 붙어있었으면 감히 다시 만날 시도를 못했을텐데 이노무 공작은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면서도, 아니 어쩌면 의심을 해서, 또 성을 비우고 장기 출타를 합니다. 사촌을 만나지 못하면서부터 성령 충만해지시며 자주 예배당에서 기도 드리게 된 공작부인. 예배당의 구조는 희귀해서 성인의 뼈를 보관하는 지하실이 있고요. 그 위에 예배실이 있는 구조에요. 부인은 예배당에 갈 때마다 잔뜩 치장을 하고서 하인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안에서 문을 걸어 잠궈 버립니다. 그러던 어느날 공작이 돌아옵니다. 신앙심에 바치는 공물이라며 아내의 조각상을 들고서요. 조각상을 제단 앞 지하실 입구에 설치하고 지하실을 잠궈버리겠다는 공작과 시퍼렇게 질린 낯으로 조각상을 다른 곳에 두자고 간청하는 공작부인, 그리고 그 결말, 소오오오오오름!!
<충만한 삶>
이생에서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했으니 저승에서 영혼의 단짝과 함께 백년해로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저승사자. 죽어 막 도착한 하늘나라에서 뜻밖의 제안을 받아 아내는 맞선을 보게 됩니다. 남편이 그녀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문을 쾅 닫고 다니고 부츠로 삐걱대는 소리를 질리도록 내던 남자였기 때문에, 삶이 공허했다고 말해왔던 아내는 드디어 안성맞춤인 인연과 마주해 영혼이 차오르는 기쁨을 느끼게 되요. 평생동안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남자와 찰떡같이 통화는 대화를 하며 이제는 해피엔딩인가 싶었는데 어쩐 일인지 빛이 나는 영혼의 남자와 한 집에 살며 영원히 함께 하는 삶에는 망설이게 됩니다. 아내는 무슨 이유로 영혼의 단짝을 앞에 두고도 고민하는 걸까요? 그들은 과연 웨딩마치를 올렸을까요? 바라마지 않던 행복을 발로 차버린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정말 소름끼치게 낭만적이라 오히려 우습고 재미있는 소설이었어요. 이디스 워튼, 사랑에 데인 적이 많은 작가거든요. 제가 예상한 줄거리와 결말이 있었는데 이건 정말 의외다 싶었습니다. 의외라서 더 취향~💛
총 8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고 덜 의아한 작품들로만 세 개를 추려봤어요. 다른 작품들은 사실 너무 많이 의아해서 제가 읽고도 뭘 읽었건지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어요. 이선 프롬이나 징구와는 달리 환상 이야기는 독자에게 마냥 친절한 작품군은 아니더라구요. 상상력을 최대치로 발휘해도 이야기에 구멍이 많아서 이렇게 생각해도 함정 같고 저렇게 생각해도 함정 같고 그래요. 그래서 재미가 없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맥락을 다 못 짚어도 섬뜩한 분위기와 미묘하게 공감되는 상황, 감정, 인간들에 감탄했어요. 전 올해 안에 여름과 순수의 시대도 다 읽어볼 생각입니다. 아참. 책 속에서 제일 와닿은 문장을 빼놓고 갈 뻔 했어요.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책 속에 경이로운 것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애할 겁니다. 마치 혼자서 산 너머 축제에 다녀온 사람 같지요."(p136) 기도하는 공작부인에서 하인이 공작을 두고 말하는 내용이에요. 책이라는 축제에 푹 빠져 현실의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공작. 그로 인해 그 자신도 아내도 사촌도 모두 불행해졌지요. 책도 좋지만 책에 너무 빠져서 현생을 망각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