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유년의 기억,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품절





웅진지식하우스 지원 도서입니다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p13)라는 소설의 시작에서 코쓱 하며 웃게 된다. 박완서 작가와 나 사이에 있는 몇 십년이나 되는 까마득한 거리가 단번에 좁혀진다. 그러게.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 작가님 세대뿐 아니라 내 세대도 그랬다. 내가 코찔찔이들이 잔존하던 마지막 세대가 아니었나 싶다. 휴지도 아니고 소매로 코를 닦아 반들반들 하던 머스매들의 소매춤도 기억이 난다. 나 다니던 학교가 아주 깡시골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손수건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는 말씀에는 아차, 시대가 언제였더라 하게 되지만은. (´▽`)>

작가님이 어린애였던 그 시절은 일제 강점기였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여타의 소설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서 1930년이나 40년대가 아니라 6, 70년대 소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친일이든 반일이든 사상적 배경들은 한껏 숨을 죽인다. 일본순사도 독립운동가도 평범한 소녀의 시야 밖이다. 나라 구하러 간 아버지를 두렵고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아이도 없다. 다만 이웃집 잔칫상에서 약과며 다식 따위를 챙겨오실 할아버지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천진난만한 아가가 있을 뿐이다. 다디단 간식을 쭉쭉 빠는 그 어린 것이 다름아닌 박완서다.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 이십 호가 채 안 되는 벽촌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와 오빠, 자식 없는 삼촌들 내외와 함께 살았다. 대가족이라는 넉넉한 울타리, 깡촌임에도 할아버지가 송도로 나가 물감을 사올 만큼은 부유한 집안, 종놈상놈 따지던 시절에 양반이라 어디 나가 무시 당하고 살 일도 없었으니 완서에겐 태평성대나 다름없던 시대였다. 아비 잃은 손녀가 가여워서 오냐오냐 사랑을 잔뜩 주는 할아버지가 있어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틈도 없었다. 어린 완서의 이야기는 봄볕처럼 따사롭고 바삭바삭하다. 인생의 여러 시름 앞에 약이 되고 거름이 될 진귀한 기억들이 열두 보따리로도 다 못쌀만큼 많다.

그런 완서의 기억이 눅눅해지기 시작한 건 서울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시골 어른들의 무지몽매함에 학을 뗀 엄마는 자식들에게 어떻게든 서울 교육을 시키겠다고 작정을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오빠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완서까지 서울행 기차를 탄다. 달동네 살이에도 딸이라고 밀쳐놓지 않고 오빠와 똑같이 공부시켰지만 완서는 그가 좋지는 않았다. 고향이 그리웠다. 산도 들도, 마을 도처에 흐르는 실개천과 된장국 구수하게 만드는 보리새우와 산딸기, 찔레순, 칡뿌리, 밤, 도토리가 서울의 자락에는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싱아가 없었다. 들큰한 맛으로 버려버린 입을 헹굴 생각으로 시고 개운한 싱아를 찾아 헤매지만 그녀 눈에 띄인 것은 벌거숭이 산과 지게꾼도 학을 떼게 높게 깎아지른 골목과 다닥다닥 붙은 걍팍한 집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어 흐르는 시궁창 물 뿐이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초반의 한가한 시골풍경, 완서를 야물게 한 서울 풍경의 중반을 지나고 나니 어느 새 6.25가 목전이다. 서울대생으로 모친과 떨어져 인생의 자유를 누려보리라던 완서의 꿈은 인민군이 내려오며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북이 내려왔을 때에는 빨갱이가 아니면 안됐고 북이 밀려 올라간 후에는 빨갱이 년으로 사람도 아닌 듯이 모욕 당했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정신병을 앓으며 돌아온 오빠를 손수레에 싣고서 떠나는 피난길. 모친은 긴 걸음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서 그옛날 달동네로 숨어 들어가자 한다. 모두가 피난가고 텅텅 비어버린 도시 속에서 거대한 공허를 목격하며 완서는 다짐한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p311)

추울만큼 쿨한 인간 박완서에 새삼 감탄하며 읽은 책이다. 심플하고 담백하고 재치있고 재미있다. 역사 의식은 다소 빈약할지 모르나 그 시절 여느 평범한 소녀들은 이렇게 살았겠구나 싶었다. 어머니 디스할 때는 시대와 세대, 지역을 떠나 모녀들의 소통이란 비슷한데가 있구나 공감도 했고.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글이라고, 있는 재료만 가지고 집짓듯 뚝딱뚝딱 맞추어나간 글짓기라고 뼛속 진까지 다 빼 주다시피 힘들게 쓴 글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어렵게 쓴 글을 쉽게 쉽게 읽어 죄송하기도 하고 우러러 뵈기도 한다. 전쟁통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마음 아파 못볼텐데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어쩌면 좋을까. 싱아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지만 그래도 끝장을 보기는 해야겠지? 어디 한번 박완서의 산으로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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