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아무런 두려움이나 혐오감 없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될 때야 비로소 완전히 끝나는 거야."(p145)
사랑이 도대체 뭘까요? 줄리언 반스가 <연애의 기억>에서 그랬지요.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레누는 절대적으로 전자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가 어쩌면 이다지도 자기 파괴적일 수 있는지 전 도통 레누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내와 이혼하겠다는 니노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서 레누는 피에트로와 이혼합니다. 알고 보니 모두 니노의 개수작이었지만요. 이혼은 커녕 니노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구요. 니노는 장인어른의 비호 속에 나폴리에서 승승장구 중이랍니다. 사실을 들키고 난 후에도 너무너무 당당해요. 레누가 화를 내서 자기가 슬프대요. 왜 자기 사랑을 몰라주녜요. 자기 뜻을 왜 그렇게 곡해하냐며 너 때문에 속상해, 나 좀 돌봐줘, 징징대는 니노 때문에 독자인 저는 치가 떨렸는데 레누는 니노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을만큼 니노를 사랑하니까요. 제 속으로 낳은 아이들 전부와 니노를 바꾸자 해도 그러겠다 할만큼 니노 밖에 모르는 바보니까요. 초반만해도 우리 레누,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망가진건가요? 레누의 사랑은 욕실에서 벌어진 니노와 가정부의 추잡한 짓거리를 목격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좋은 감정은 연약한 거야. 내게는 사랑조차 오래가지 못해.
남자에 대한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구멍이 나버려."(p242)
레누가 니노와의 불륜으로 커리어와 가정생활을 망가뜨려 갈 때 릴라는 컴퓨터 사업가로 고향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습니다. 그즈음 두 사람 다 임신을 하게 되는대요. 첫 아이 젠나로를 임신했을 때와 달리 릴라는 기쁜 마음으로 둘째 아이를 받아들여요. 티나의 탄생은 릴라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주었고 니노와 헤어져 거지꼴이 되고 만 레누와도 아래윗집에 살면서 전에 없이 공고한 우정을 다지게 되요. 이 때의 4년이 아마도 릴라의 일생 중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딸 티나가 실종되면서 릴라의 인생은 다시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요. 영원히 빛 하나 들지 않을 것 같은 릴라의 우울을 마주하며 지쳐버린 엔초는 릴라를 떠나게 되요. 레누 또한 릴라의 곁에서 머무르기를 포기해 릴라는 고향집에 홀로 남게 됩니다. 접점없이 멀어진 두 사람은 이후 과거와 같은 우정을 절대 회복하지 못해요. 릴라가 실종되었다는 젠나로의 전화를 받고서 레누는 화가 납니다. 이름 한 자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려는 릴라에 대항해 레누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을 집필해요. 릴라는 어디에 있을까요? 평생 나폴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릴라가 나폴리 밖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길 새로운 끝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리나답게 어디선가 기발하고 똑똑한 일을 하고 있겠지."(p659) 꼭 파스콸레의 말과 같기를. 고난에 부치고 힘겨웠던 릴라의 인생이 이제는 편안하기를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나 자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영원히 끝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이야기를 끝마친 것이다."(p657)
2020년 12월 13일부터 시작한 나폴리 4부작의 여정을 해를 넘긴 2021년 1월 10일에 종료합니다.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까지 총 2436쪽에 달하는 긴 여정이었어요. 이탈로 칼비노 외에는 알고 있는 이탈리아 작가도 없고 작가의 후속작인 어른들의 거짓된 삶이 취향과 비취향 사이를 어중간하게 오간 터라 살짝 걱정을 했는데요. 가독성이 워낙에 출중해서 낯선 이름, 낯선 지명, 무엇보다 낯선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이탈리아 전경을 무리 없이 소화한 것 같아요. 일상적으로 접하는 여성 서사, 여성 성장소설과는 좀 다른 느낌입니다. 아, 이렇게 쓰니까 말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익숙한 영미식 여성 서사, 성잘 소설 느낌이 아니다 라고 하는 편이 더 분명하겠습니다. 고난 중에도 가슴 따뜻한 이웃, 친구, 동료를 만나 유쾌하고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러시아식? 프랑스적인? 막장 고전 느낌이에요. 결말까지도 독자에 따라서는 좀 애매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 나 자신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해질 것 같아."(p638) 어쩌면 좋죠. 활자로 남아버린 릴라의 일생, 저는 도무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