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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ㅣ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평점 :
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p416)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릴라와 나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그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p29) 전후의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가스, 전쟁, 절단기, 돌담, 노동, 폭격, 폭탄, 결핵에서 화농까지 목숨을 앗아가는 단어로 가득 찬 세상"(p34)에서 생의 싹을 틔운 두 소녀가 있습니다. 마녀 같다는 평을 듣는 소녀 릴라와 모범생으로 칭찬이 자자한 레누, 이제 6살 난 아이들이에요. 검은 잉크 묻은 종이를 붙여 친구와 선생님을 더럽히고 레누가 아끼는 인형을 무서운 지하실 계단으로 던져버리는 릴라는 누가 봐도 참말 못된 소녀지만요. 레누는 나날이 릴라에게 매료되어 갑니다. 릴라는 똑똑해요. 노력이란 단어도 이 아이 앞에선 빛이 바랠만큼 특출난 아이입니다. 레누를 단숨에 앞질러 1등을 차지하고, 가르침 없이도 홀로 깊은 사유를 해내고,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며, 편지 한 장으로 레누의 눈물을 쏟게 하는 릴라의 재능을 레누는 성장하는 내내 선망과 질투와 어쩔 수 없는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레누의 시선으로 릴라를 마주하며 독자인 저도 릴라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초반엔 얄밉기도 했지만 설령 올바른 선택은 아닐지언정 망설임 없이 인생을 헤쳐가는 모습이 빛이 나더라구요.
"머리에서 태어난 꿈이 발밑으로 추락했잖아."(p418) 한몸처럼 붙어다니던 두 아이가 각기 다른 길에 들어선 건 "중학교 진학"을 앞둔 때였습니다. 5, 60년대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여자애가 배워서 뭐해 라는 가치관이 팽배했던 나폴리. 릴라와 레누 두 사람 다 중학교 진학을 바랬지만 시청 경비원인 레누의 아버지가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누를 중학교에 보낸 것과 달리 구둣방 주인인 릴라의 아버지는 입학시험을 치르겠다는 딸을 창밖으로 집어던져 팔을 부러뜨립니다. 레누가 배움의 발견 속에서 긍정적으로, 한발한발, 느리지만 착실하게 성장한 것과는 달리 릴라는 가난과 가족과의 갈등 속에 정체됩니다. 아버지에게 구두 제작 기술을 전수 받아 공방에 대한 새로운 꿈을 키우지만 이 같은 희망이 오빠 리노의 허영심을 자극해 릴라의 삶을 핍박하는 결과까지 가져와요. 빠르게 부자가 되고 싶었던 리노는 동생을 위해 아버지와 대적하던 우애를 잃고 릴라의 인생쯤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해 버렸습니다. 원치 않은 남자와 약혼하게 될지도 모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릴라는 15세의 나이에 또다른 구애자 스테파노의 손을 잡습니다. 학업이 아닌 부유한 남자의 인생에 편승한 릴라의 걸음은 런웨이를 걷듯 눈부시지만 뾰족하고 높은 하이힐 위에 올라선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스테파노의 야망이 결코 가볍지 않으리란 걸 암시하는 결말까지 더해지며 조마조마한 마음 가눌 길 없이 마지막 장을 덮었어요.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함겹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p40) 릴라의 사춘기를 지배했던 구두. <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 초반부엔 등장하던 신화 속 각종 신발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후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자각하며 왕이 된 남자 모노달로스 이아손, 신분을 증명해줄 가죽신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테세우스, 신데렐라, 콩쥐팥쥐, 모세, 신발을 끌고 온 어느 누군가들의 역사... 릴라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제작한 첫번째 신발을 잃어버립니다. 릴라의 역사, 꿈, 자아, 시작, 결연, 탈출, 신발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든 릴라는 이 모든 걸 남편에게 도둑 맞았습니다. 도둑 맞았다는 사실을 결혼식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첫줄을 써나가는 날 목격했고, 깨닫습니다. 나폴리 4부작 2권 <새로운 이야기>는 릴라의 잃어버린 신발을 되찾는 이야기가 될까요? 영광스러운 회복? 아니면 어느 섬돌 아래 묻힌 신발을 힘껏 구해내지 못한 채로 파멸을 맞이할까요? 릴라가 결혼의 굴레에 갇힌 것과 대조적으로 릴라를 훔쳐보고 릴라의 주변을 멤돌고 릴라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공유하고팠던 레누는 릴라 없이 학문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뜻을 펼치겠지요? 빛과 어둠처럼 삶의 위치를 달리하며 파란만장하게 성장하는 릴라와 레누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곧장 2권을 펼쳐봅니다. 작가님, 부디 릴라와 레누를 행복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