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빨강머리 앤이 가르쳐준 소중한 것 - 앤을 좋아해서 다행이야
모기 겐이치로 지음, 양지윤 옮김 / 프로제 / 2020년 11월
평점 :
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앤을 좋아해서 다행이야"
앤이 왜 좋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빨강머리 앤이 가르쳐준 소중한 것>을 읽고서야 처음으로 내가 앤을 좋아하는 이유, 어른이 된 많은 독자들이 11살 어린 소녀에게 여전히 매료되는 까닭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출간된지 100년도 지난 책이 매해 다양한 출판사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나와 독자를 만날 수 있었던 데에는 앤이 전하는 삶의 메시지가 큰 몫을 했는데요. 일본의 저명한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가 자신의 감상을 더해 이를 설명합니다. 초등학교 5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앤을 만나 무심코 앤을 읽었고 이후 앤의 세계에 흠뻑 빠져 앤의 10부작 번역본뿐 아니라 원서까지 모조리 독파했다는 작가님. 앤을 만나기 위해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여행도 가고 앤에 대한 동경으로 캐나다에서 유학생활까지 하셨다니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앤의 팬이십니다. 그럼 이제 뇌과학자 모기와 함께 인생의 소중한 부분을 배우러 출발해 볼까요?
1. "아침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p18)
"주어진 환경이 각박하거나 삶이 자신의 뜻대로 잘 굴러가지 않더라도 상상력을 보태면 인생이 즐거워진다는 것이, 이 작품이 전하는 커다란 메세지입니다"(p27) 앤은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까지 아주 외로운 소녀였어요. 고아였고 친구도 없었으니까요. 토마스 부인과 해럴드 아줌마의 집이 아이들로 북적이긴 했지만 앤이 돌봐야 할 노동의 대상이었지 친구였던 적은 없거든요. 앤은 상상 속에서 친구를 만들어 냅니다. 토머스 부인 집에선 책장 유리에 비친 제 모습에 케이트 모리스라는 이름을 붙여 모든 속내를 털어놓구요. 책장조차 없었던 해럴드 아줌마 집에선 골짜기의 메아리를 비올레타라는 소녀라고 상상했어요. 다이애나라는 마음의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 두 친구를 인생의 위안이자 위로로 삼았던 앤의 상상력이 정말 놀랍죠? 모르는 게 많아서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난다고 생각하고, 퍼프 소매의 원피스를 입은 친구가 부럽긴해도 주눅 들거나 샘내기 보다 언젠가는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를 입길 희망하며 상상 속에서 예쁜 옷들을 입어 보는, 상상의 내공과 긍정성을 본받고 싶어요. 상상이 부정적으로 흘러서 유령의 숲 같은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앤의 상상력은 앤과 앤을 사랑하는 주변 사람 그리고 독자 모두의 행복이 되니까요.
2. "마릴라 아주머니, 저는 오늘 즐겁게 가기로 결심했어요. 마음만 굳게 먹으면 거의 모든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어요. 제 좌우명이에요. 물론 아주 단단히 결심해야 하지만요." (빨강 머리 앤, 알에이치케이코리아)
착오로 인해 초록 지붕 집에 오게 된 다음 날 아침. 펑펑 울다 잠든 앤은 평화로운 아침 풍경에 감화되어 더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지 않기로 결심해요. 고아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잠시 잊고 지금 가는 길만 생각하죠. 들장미도 바닷가 길도 하다 못해 나무와 꽃, 과수원,개울까지 모두가 아름다운데 이런 풍경을 그저 흘려보내는 건 아까운 일이라는 걸 알았던겁니다. 절망 속에서 앤의 희망을 싹 틔워줄 씨앗이 그런 사소하고도 별 거 없는 풍경이며 소리이고 색이었으니까요. 초록 지붕 집에 온 이후로도 시시때때로 앤은 힘든 일을 겪지만요. 그때마다 앤은 상황의 장점을 찾아내고 굳세게 이겨내요. 8살 밖에 안된 나이에 여덟 명의 아이들을 돌봤고, 가족이 생길 기회를 잃고 고아원에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였으며, 친구들 속에서 부당한 벌을 받고, 하고 싶지 않은 사과를 하고,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대학이라는 거대한 꿈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을 때조차 앤은 결심하기 전까지는 고민할지언정 딱 결정이 나고 나면 불평은 그치고 최선을 다해 즐거움을 찾아내요. 저는 불평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인데요. 앤을 보고 반성합니다.
3. "세런디피티, 뜻밖의 행운을 만나는 능력, 스스로 생각했을 때 좋은 방향이라는 판단이 선다면 머리속으로만 끝내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합시다." (122)
앤과 다이애나가 조세핀 할머니가 누워있는 줄 모르고 손님 방으로 뛰어든 다음 날. 화가 난 할머니는 다이애나의 집에서 하루도 더 머물기 싫다며 나갈 준비를 합니다. 다이애나에게 주기로 했던 피아노 레슨비도 칼 같이 끊겠다고 하구요. 이 얘기를 전하면서 다이애나는 앤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 앤도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요. 만약 제가 앤이었다면 후회를 하고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였을지언정 할머니를 만날 생각은 못했을 거에요. 오히려 다이애나가 나한테 할머니 좀 만나달라고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을지도요. 낯선 할머니께 혼나는 건 상상만 해도 무섭거든요. 그런데 앤은 그러지 말라 말리는 다이애나를 설득해 성큼 조세핀 할머니를 만나러 가요. 손을 덜덜 떨면서도 당시의 상황이 자신의 책임임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앤의 솔직한 기질에 반한 조세핀은 두 아이를 용서하고 이후 앤의 조력자이자 친구로 남아 시시때때로 도움을 줘요. 앤의 이런 행운은 생각하고 상상하는 힘에 있지 않았습니다.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력이 근간이 됐어요. 물론 겁도 없이 혼자 배를 타고 강물에서 떠내려가는 등의 모험으로 위험에 처할 때도 있긴 하지만요. 앤에게 돌아오는 각종의 행운들은 "좀처럼 행운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유지해나가는 일"(p19)에서 기원한다는 뇌과학자의 말씀 적극 동감합니다.
낭만을 잃지 말아요. 호기심과 상상력, 감수성과 동심을 갈고 닦아 둔감하지 않으려 노력하구요. 무엇보다 행동하자고 새삼 결심합니다. 제랴늄 한 송이에도 기쁨을 발견하고 소박한 행복을 곳곳에 포진시키며 일상을 소소한 행복으로 정성스레 써내려 간다면 앤을 읽는 일처럼 내 일상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이 앤 같은 친구를 꿈꿨던 저는 이제는 앤의 장점을 취해 앤 같은 동심을 간직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참. 작가님이 남자에요. 제가 얼마나 편견 가득한 독자였는지 저는 앤을 소년이나 성인 남자가 읽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후기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얼마나 좁은 시야의 사람인지 새삼 깨닭아 부끄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