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고아 소녀 앤이 마릴라와 매슈 남매의 초록 지붕 집에 살면서 성장하는 이야기. 빨강 머리 앤을 한 줄로 요약하는 건 무척 쉽다. 그러나 앤의 매력은 이 한 줄로 표현할 수도 없고 독서를 한대도 첫눈에 앤의 매력을 다 알기도 어렵다. 앤은 거듭 읽어야 한다. 나도 몇 번째인지 모를 앤을 또 읽었다. 한두번이 아닌 건 확실해서 빨강 머리 앤 속에 등장하는 각종 사건들, 앤의 상상과 말썽에 대해서라면 빠삭하다고 자부한다. 초록 지붕 집에서 마중 올 사람을 기다리는 앤, 어느 엉뚱한 농부가 심어놓은 사과나무 길에 첫눈에 반해 기쁨의 하얀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앤, 마릴리와 매슈가 기다리던 아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는 앤,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기도 드리는 앤, 다이애나와 마음의 친구가 되어 우정을 맹세하는 앤, 길버트의 놀림에 석판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앤, 다이애나에게 포도주를 먹인 앤, 후두염으로 죽을 뻔한 미니메이를 살리는 앤, 베리 부인을 위한 케이크에 진통제를 넣는 앤, 조세핀 할머니가 누운 손님방의 침대로 뛰어드는 앤, 머리를 초록으로 염색한 앤, 백합공주가 된 앤, 처음으로 퍼프 소매 원피스를 입게 된 앤, 매슈와 마릴라가 천국에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끼게 될만큼 자랑스러운 성적을 낸 앤 등 무수한 앤의 이야기를 이미 충분할만큼 잘 아는데 충분치 못했던 것처럼 다시 행복해진다. 왜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옛날 얘기를 하면서 매번 똑같은 부분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그리워하지 않나. 앤을 만난 나도 꼭 그런 기분이 되어 울고 웃는다. 매번 처음인 듯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소녀는 없을거야 감탄하면서.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이 어느 앤이나 훌륭하지만 알에이치코리아의 빨강 머리 앤은 설찌 작가의 삽화 때문에 한층 특색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이 아닌 것이다. 팔꿈치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앤의 꿈을 이뤄주듯 모든 삽화 속의 앤이 포동포동하게 웃는다. 물론 말썽을 일으켜 아주 혼이 날 때는 울기도 하지만. 내용과는 조금씩 다른 풍경들도 원작을 해치기 보단 원작에 신선함을 더한다. 박혜원 작가의 재치 넘치는 번역도 좋다. 두어번 등장하는 오타는 아쉽지만 마릴라의 시니컬한 유머 감각을 잘 살린 각편의 마무리가 백점 만점. 마릴라를 근엄하고 진지하기만 한 사람이라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오해는 번역 탓이 상당하다. 실은 상당한 유머 감각을 지닌 여인으로 잘된 번역으로 마릴라를 만나면 앤을 향한 뼈 때리는 질타 속에 웃음이 감춰져 있는 걸 느낄 수 있는데 이번 번역본이 그랬다. 하도 읽어서일까? 여태와는 달리 사건 보다 사소한 사실들이 눈에 들어와 재미를 더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정보들 말이다. 2월 생인 다이애나와 3월 생인 앤. 두 사람을 좋아한다면서 왜 여태 이들의 생일을 축하해 줄 생각을 안했을까? 동갑내기 같지만 실은 길버트와 앤은 2살 차이가 난다. 같은 학급에서 공부를 하고 긴 세월 라이벌이었으며 서로를 오빠동생으로 칭하지 않아서 내내 인지를 못했나 보다. 길버트가 앤에게 준 사탕에 적혀 있던 문구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는 걸, 앤이 길버트의 턱을 보고 잘 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은 있었다는 걸 이제는 잊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이런 자잘하고 소소한 내용들을 몰라도 책을 이해하는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나는 앤의 팬이니까! 재독하지 않았다면 인지하지 못했을 이런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말할 수 있게 된 게 못내 뿌듯하다. 앤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 늘어간다는 게 참 좋다. 무엇보다 이번 독서에서도 앤이 여전히 재미있는 친구, 다정한 친구, 또 읽고 싶은 친구로 남았다는 게 고맙다. 나이를 먹고 세월의 떼를 묻혀 가며 내가 얼마나 삭막한 어른으로 변하고 있는지를 알아서 앤을 펼칠 때마다 살짝 겁이 난다. 앤이 유치하게 느껴지면 어쩌지? 앤의 수다에 짜증나거나 귀따갑게 느껴지면? 앤의 슬픔, 외로움, 욕망, 갈등, 기쁨에 공감하기보다 하나하나 훈수 두고 잔소리하고 가르치고 싶어지면?? 그만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어떡하나 생각하며 책을 펼치는데 이번에도 고비없이 완독을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앤이 불러일으키는 동심과 애정만큼은 언제까지고 식지 않기를. 앞으로도 셀 수 없이 앤을 만나고 지치지 않고 앤에게 감격할 수 있었으면. 어른이 되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많이 쑥스럽지만 앤 나는 네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