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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수필
정상원 지음 / 아침의정원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먼저 전하는 말 : 재미있다! 읽자! 독서 에세이 취향인 독자는 백퍼 이 책 입맛임. 제목 때문에 무관심한 독자님들아 여기 맛집이여!!
소설 편독파인 나는 에세이 장르는 영 쥐약이다. 미식과도 탐식과도 거리가 멀어서 셰프의 에세이에는 완전 무관심. 평소라면 들춰보지 않았을 책인데 책 소개를 읽다 다음 구절의 한 단어에 꽂혔다. "호세의 집으로 가는 길은 건조한 사막으로 이루어진 마드리드 남부의 라만차 황무지다. 끝없이 이어진 황무지를 건너다보면 목이 칼칼하다. 돈키호테가 한 판 승부를 벌인 언덕 위의 풍차가 아니면 방향을 가늠할 이정표조차 없다. 황무지의 칼칼함을 달래주는 것은 다름 아닌 동치미다."(p25) 돈키호테의 완독에 다소 과하게 자부심을 느끼는 나는 그 이름 앞에서 발을 멈추기 일쑤다. 알마그로 동치미가 라만차의 전통 음식이라면 풍차에 대패한 후 몸을 못편 채로 비척비척 귀가한 끼하다 영감님도 부글부글 끓는 속을 동치미로 달랬을지 모를 일이잖는가. 이번엔 라만차의 동치미 항아리에 관해 알아보자 하며 읽게 되었는데 내 선구안 어쩔. 이 책을 에세이라고 접고 갔으면 나 대박 후회했다.
일단, 제목은 수필인데 장르가 교양 인문학이다. 어떻게 이런 함정을 파셨는지 작가님과 출판사에 깜놀. 그야 에세이라기엔 표지가 좀 무겁고 색이 장중하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래도 어쨌거나 "수필"이니 당연히 에세이인 줄로만 알았지 뭔가. 이단, 셰프가 지식 보부상으로 나서서 한 보따리 이고지고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다. 풍경과 과학, 음악과 미술까지 맛으로 인식하는 셰프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 일이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여태껏 뉴턴의 사과와 세잔의 사과 품종을 궁금해본 일이 없다. 뉴턴이 머리에 맞은 사과가 켄트의 꽃이라는 품종인 줄도 알지 못했고 그 사과가 아리고 푸석푸석해서 바로 먹기 별로라는 것도 몰랐다. 켄트의 꽃이 크고 단단했다면 뉴턴의 머리에는 다른 시련이 닥쳤을지 모른다는 셰프의 농담에 웃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먹는 포도 품종, 동유럽의 식문화 속에서 발견하는 같은 뿌리 하나, 붉은 돼지 식당의 계급적 메뉴판, 토마토를 먹는 모험가를 보고 기절 또는 사망한 포르투갈 사람들, 칠성 사이다가 왜 "칠성"인지를 알고 느낀 문화충격, 먹는 일에 관심이 많은 독자는 당연하고 관심없는 독자도 눈 동그랗게 뜨고 만나는 식탐험을 위한 안내서 되시겠다. 삼단, 셰프의 독서 이야기가 알차다. "글의 행간에서 육즙을 찾아내고 사용된 조사가 문맥상 후추인지 소금인지 구별해야 한다. 가자미는 굽고 생태는 끓여야 하는 것처럼 정해진 문법에 맞춘다면 냄비 안의 글자들은 맛있게 조리된다."(p297) 셰프는 이렇게 읽고 이렇게 감상하고 이렇게 요리로써 쓴다는 독후기를 읽고 나니 나 정말 반했어요 정상원! 정상원!! 사단, 셰프님과 유머코드가 통하면 좀 웃긴다. 이건 읽어야만 아는 맛이라 더는 설명 생략. 오단, 음식 사진이 많아서 책만 봐도 먹음직스럽다. 방구석에서 떠나는 유럽 식도락 여행이라는 출판사의 홍보에 거짓은 1도 없었다는 거. 출판사도 칭촨해!
책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서는 책 제목을 "글자수프"로 했으면 어땠을까도 싶지만 그렇게 되면 주제와 소재에서 너무 벗어나게 되겠지? 하여튼, 아이참, 이 책 진짜 정말 좋다. 못믿겠으면 도서관 희망 도서라도 꼬옥 신청해서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문 닫는 곳이 많다지만) 이 짭쪼롬하게 맛있는 여행 맛, 음식의 맛, 글 맛을 양 어금니 꽉 꽉 느껴보시기를 바란다. 아차, 기사소설이 한가득 불탔던 끼하다 영감님의 정원 풍경에서 장독 카수엘라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책이 너무 두꺼운데다 라만차 사람들도 우리처럼 장독을 마당에 묻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서 포기했다. 언젠가 돈키호테를 재독하게 된다면 그땐 돈키호테 속 음식도 더욱 세심하게 체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