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페달을 밟습니다 - 58일간의 좌충우돌 자전거 미국 횡단기
엘리너 데이비스 지음, 임슬애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좋아하는 책 중에 <달려라 스미시> 라는 작품이 있다. 부모님을 교통 사고로 떠나 보낸 후 외톨박이처럼 살고 있는 스미시씨. 여느 때처럼 공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공허한 마음에 맥주를 홀짝이던 그는 누나의 시체를 확인하라는 전화에 몸을 일으켜 어린 시절에 탔던 자전거를 꺼내 무작정 길 위에 오른다. 길은 그에게 공포이지만 정신병에 걸려 집 나간 누나를, 누나일지도 모를 그 시체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거다. 그의 묵묵한 페달밟기가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길 위에서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난 것도 아니요 비만이던 그가 홀쭉 살이 빠져 미남으로 변모하는 일도 없었다. 시체가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꺼졌다. 자전거를 타기 전이나 탄 후에나 스미시씨는 43세, 독신남성, 어쩌면 무직(회사가 그를 받아줬을까?), 돌아갈 곳은 친구 같이 편안한 소파가 있고 수다쟁이 티비가 있는 지저분한 빈집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묵묵한 페달밟기가 좋았다. 길 위에서 자유를 느끼고 부푸는 마음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그에게서 내게 없는 용기를 보았기 때문일까. 이번에 만난 책의 주인공 또한 스미시씨랑 똑같이 자전거를 탄다. 홀로 2736km의 거리를 58일간 횡단하는 여정. 스미시씨와의 차이점이라면 작가가 머릿속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험한 일기라는 거다.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페달을 밟습니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시작된 엘리너 데이비스의 미국 횡단기. 그 속에서 나는 또 어떤 용기를 보게 될까?

엘리너의 계획은 이렇다. 자전거를 타고 애리조나주 투손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조지아주 애선스에 있는 그녀 집까지 달려볼 생각이다. 자전거 여행을 결심한 이유를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2세 계획이 있다고, 아빠가 조립해준 자전거를 택배로 부치기 싫어서 직접 배송 중이라고 말한다. 실상은 힘들어서, 살기 싫어서, 그래도 자전거를 타면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건데. 부모님과 남편의 걱정을 배웅하고서 길 위에 올랐다. 언니 멋져! 피스 사인으로 응원하며 맞으편에서 자전거를 타는 여행자를 만날 땐 괜히 울컥했고 오토바이족을 만나 농담 따먹기도 한다. 사막 한구석에 캠핑하던 날도 있었고 무릎이 아파 엉엉 울던 밤도 있었다. 포기할 생각으로 부모님께 전화한 적도 있지만 고지를 넘어 고비를 지나고 보니 그또한 지나간 일이 되어 즐겁게 노래 부르며 자전거를 달리기도 한다. 국경 순찰대에 쫓겨 가는 사람, 홀로 여행하는 길손이 걱정되어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 무릎에 좋은 운동을 알려주는 스포츠 닥터도 만난다. 일상을 벗어났다고 해서 아무 스트레스도 없이 오로지 즐거운 일만 가득할 거라는 낭만만큼은 와장창 깨트린다. 자전거를 타는 일은 몸에 큰 무리가 가는 노동이고 내가 이걸 왜 시작했을까 때려치고 싶은 순간들이 주기적으로 돌아온다는 걸 알려준다. 포기를 생각하면 창피하고 우울할 내일을 미리 걱정할 때도 있다. 56일째 되던 날 태양이 있고 시원한 공기에 새, 나뭇잎이 풍요로운 길 위에서 으쌰으쌰 힘내다가 돌연 엘리너는 결심한다. 포기하겠다고. 먼 길을 묵묵히 자신을 끌고 온 몸에 더는 할 짓이 아니라고 느낀 그녀는 마지막 960킬로를 포기하고 집에 있는 남편에게 SOS를 친다. 횡단성공의 목표를 달성했다면 기분이 무척 좋았겠지만 포기를 허락하는 일 역시 기분 좋은 일임을 깨닫고서 더는 우울해질지도 모를 내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오늘의 기분은 그렇다.

책이 독특하다. 저자의 요청으로 옮긴이 주를 제외한 모든 글자가 손글씨로 쓰여 있다. 선이 단순해서 찌질함은 강조되는 연필 드로잉은 또 어떻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남편을 불러 차를 탄 것까지 취향이라면 저자한텐 좀 미안한 일인가? 성공만이 의미있나 뭐.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 용기를 냈다는 것, 즐겁게 포기하고 이를 실패라 생각하지 않는 것, 여전히 자전거를 좋아하는 것, 더욱 즐겁게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 포기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니 한도 끝도 없는걸. 대학생 땐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차 옆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이 무서워져 버렸다. 자전거 도로가 더욱 잘 정비되서 씽씽 쌩쌩 달려보면 좋겠는데. 나도 언젠가는 자전거를 타고 단순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스미시도 느꼈고 엘리너도 느낀 그 마음을 품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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