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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 글쓰기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 25명의 삶과 철학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평점 :
샛노란 띠지의 문구가 눈에 띕니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글을 쓴다." 15살 반의 나이에 서른을 훌쩍 넘긴 중국인 남자의 초대에 응해 리무진에 올라탄 소녀. 섬세한 감수성의 지적이고 강인한 그 아이는 가난과 어머니라는 폭력에 내몰린 상태였어요. 남자의 독신 아파트에서 벌거벗은 육체로 뒹구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해방구도 찾을 수가 없었죠.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돌아간 소녀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순간에 글을 썼던가 봅니다. 한때 소녀의 어머니가 폄훼해 마지 않았던 무가치하고 직업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 글쓰기로 소녀는 작가가 되었고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도 남을 돈을 벌었으며 문학이 이어준 사랑과 죽는 날까지 함께하며 삶을 개척합니다. 1930년대 무더운 계절 위를 흘러가던 메콩 강의 바람 또한 독자들에게 남겨주었지요. 뒤라스 뿐만이 아닙니다. 도리스 레싱, 버지니아 울프,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프리다 칼로, 앤 카슨, 실비아 플라스, 제이디 스미스, 에밀리 디킨슨,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크리스타 볼프, 마거릿 애트우드, 글로리아 스타이넘, 수전 손택, 에밀리 브론테, 토니 모리슨, 나딘 고디머, 가네코 후미코, 박경리, 헤르타 뮐러, 이사벨 아옌데, 이자크 디네센, 제인 구달, 이윤 리, 제인 제이콥스. 낯익은 이름, 이미 읽어본 작품도 있었지만요. 솔직히 모르는 이름, 표지 한번 들춰본 적 없는 작품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쓰고 싸우고 살아남는 이야기에는 하나 빠짐없이 가슴이 뛰었어요. 글쓰기에 온전히 몰입한 작가들의 인생 이야기가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거든요.
도리스 레싱은 얘기합니다. "80세가 훌쩍 넘어 생각해봐도 평생 제일 좋았던 날은 책이 도착하는 날들"(p26)이었다구요. 1919년에 태어난 작가님도 우리처럼 책택배를 받으며 기뻐하셨던 걸까요? 책을 제일 많이, 모든 걸 다 읽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공산주의자들이라 공산당 작가 모임에까지 들어간 작가님의 이야기에는 큭큭 웃음이 터졌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글쎄, 천국을 피곤하지 않은 상태로 영원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누군가의 칭찬 다른 어떤 이의 인정도 필요없이 앞으로 나아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글쓰기에 대한 찬양에 완독에 실패한 자기만의 방을 다시금 시도하고픈 욕망이 일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에 대해 세간에서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자살한냥 떠들어댔다지요? 그러나 작가의 삶의 기록을 더 샅샅이 들여다보면 글을 쓰지 않고 사는 삶이 더는 불가능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글쓴이의 추측일 뿐이라지만, 독자인 저도 이 의견에 지지를 보내고 싶었어요. 40여년의 시간을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채로 글을 쓴 에밀리 디킨슨, "군함없이도 책 한 권이면 돼 / 우리를 대륙으로 데려다주지"(p97) 답답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부럽다는 생각뿐! 세 권? 네 권? 표지가 예뻐서 소장만 하고 여태 읽지 않고 있는 특별판의 주인공 마거릿 애트우드 작가 또한 반갑습니다. "역사상 인간이 어딘가에서 한 일"(p127)만을 쓴다는 애트우드의 책을 이제는 읽어야 할 때인가 봅니다. "문학은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p148)이라고 말한 수잔 손택과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한 브론테 자매들, "실전을 경험하고 전쟁 이야기만 늘 쓰는 남성 작가에게는 왜 사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는가"(p192) 일침하는 박경리 작가님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니 그냥 솔직히 말해 시작하는 쪽부터 끝나는 쪽까지 버릴 문장, 그저 그런 작가, 인상 깊지 않은 작가님의 삶이란 없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운명과 싸우며 자신 안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 작가 25인의 이야기를 꼬옥 만나보시라고 강추합니다. 6월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았을 뿐만 아니라 2020년에 읽은 책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마음에 남는 책이었어요. 재미있고 웃기고 섹시하고 감동적이고 설레고 아주 혼자 다하는 책!! 소설도 아닌데 이만큼 몰입해서 읽고 적극적으로 강추한 책도 없지 싶어요. 꼭꼭꼭 읽어보십셔. 꼭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