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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 특별 합본판 ㅣ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1113-1196. 5권에 들어가기에 앞서 페이지부터 확인했다. 과업을 완성한 헤라클레스의 기쁨만은 못하더라도 내 나름 5월 독서의 가장 큰 목표였던 그리스 로마 신화 완독을 코앞에 두고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드디어! 오늘! 마침표를 찍는구나 싶어서. 아침 일찍 눈을 떠 책을 읽으면서도 5권을 읽을 동안은 피곤을 몰랐다. 펠리온산에서 15년 간이나 활쏘기와 수금, 배 짓는 법, 뱃길 짐작하는 법, 쟁기질하는 법을 익히고 하산한 이아손도 아나우로스강 변에서는 나처럼 피곤을 몰랐으리라. 그 기분, 노파로 분장한 헤라의 엄청난 몸무게에 금방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 (역사가 아니라 신화이기에 시대 추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왠지 이 숫자 마음에 든다.) 그리스 북부의 야트막한 강변에 한 청년이 우뚝 섰다. 그 이름 이아손. 이올코스의 왕 아이손의 아들이다. 왕자가 어찌해 켄타우로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산에 숨어 살았는가. 아비는 무능하고 삼촌은 찬탈자라 불리며 왕위에 올랐을만큼 야욕이 넘쳤으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 무정한 이복 아우 손에 죽을까 그 부모가 일찌감치 어린 것을 빼돌린 탓이다. 말 탈 팔자가 아니라던 스승의 말이 꼭 들어맞아 이아손은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배를 만든다.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던 흑해를 가로질러 머나먼 콜키스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프릭소스와 헬레 남매를 피신시킨 금양의 가죽을 찾아 모험을 시작한 아르고 원정대. 원정대의 대장이 되어 헬라클레스와 50인의 영웅과 함께 떠난 이아손의 항해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중 하나다. 이아손을 사랑해 조국과 아버지와 형제를 버린 메데이아와 그녀가 당한 배신과 종말의 비극도 빼놓아서는 안되겠다.
사실 5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다. 매 권의 처음에 등장하는 말머리가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5권의 들어가는 말은 유독 좋았다. 어떻게해서 이윤기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쓰기 시작했는지 그 여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작가가 쏜 화살에 제대로 맞은 독자로써 마냥 뿌듯해진 탓이다 . "나는 내 연하의 독자들을 향하여, 특히 좌절을 자주 경험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활을 겨누듯이 겨냥하고 쓴다. 먼 길을 가자면 높은 산도 넘고 깊은 물도 건너야 한다. 먼 바다를 항해하자면 풍랑도 만나고 암초도 만난다. 이 장애물들이 바로 개인의 흑해, 개인의 쉼플레가데스다. 이것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못한다면, 난바다로 배를 띄우지 못한다면 우리 개개인에게 금양모피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쉼플레가데스 사이를 지나고 우리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p1033) 쉼플레가데스는 두 개의 충돌하는 바위섬이다. 두 개의 섬은 싸늘한 역풍과 물보라를 몰아 지나가는 배를 향해 맞부딪힌다. 이아손은 흰 비둘기를 날린 후 그를 쫓아 바위 사이를 지난다. 아르고호가 바위 사이를 지나고부터는 바위는 더는 배들을 부수지 않았다. 5월의 내게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쉼플레가데스 사이를 수월하게 건너게 하는 한 마리 비둘기였다.
5월 7일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25일까지 끌고 오면서 참 징하게도 오래 읽는다고 생각했다. 주말이 없는 달이라 책 읽을 짬을 새벽에 겨우 내는 터라 속도는 더디고 피곤도 했다. 2000년에 1권이 출간되고 그로부터 10년 후 5권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런 생각이 쑤욱 들어갔다. 5권 분량이 유난히 작아서 이상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페이지가 줄수록 어라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데 걱정이 됐다. 아버지 페레우스로부터 받은 물푸레나무 창, 갑옷, 영원히 죽지 않는 말 크산토스와 발리우스를 타고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아킬레우스의 이야기가 없었다. 아테네 최고의 영웅 테세우스는 독자를 놀리듯 간만 보고는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도 안했다. 그런데 책이 끝났다. 잘 따라오느냐고 묻고 또 묻다 날빛 아래 채 나오기도 전에 에우뤼디케를 뒤돌아보고 말았던, 그리하여 저승에 또다시 아내를 빼앗기고 홀로 남겨진 오르페우스가 된 기분이었다. 혼란한 마음에 다 늦게서야 책에 관한 이야기들을 찾아 보고 연유를 확인했다. 2010년 8월에 선생님이 별세하셨단다. 이후 유족들이 짐을 정리하다가 이 원고가 든 파일을 발견했고 5권은 그로부터 한달 후인 9월에 출간되었다고. 서문의 글귀는 더욱 애달프고 5권의 마지막을 장식한 머물지 않는 영웅과 떠도는 사람들, 길 위의 사람들에 대한 글귀가 의미심장하다. 앞소리꾼이 불러주는대로 듣고 따르며 신화라는 바퀴를 굴렸는데 다 돌아보기도 전에 바퀴가 멈춰버렸다. 어느 날엔가는 나 혼자서도 신화 속을 자유롭게 거닐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닌데. 더 이어지지 못한 페이지가 아쉽고 그럼에도 1천쪽 신화의 바다를 누빌 수 있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