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 특별 합본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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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20주년, 작가의 타계 10주기를 기리기 위해 다섯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묶은 특별판이 출간됐다. 이름하야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특별 합본판".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들뜨기 시작한 마음은 거대하고 근사한 책을 직접 확인하며 팡 하고 터지는가 싶더니 매일의 아침독서로 함께 하며 깊게 정들고 있다. 언제 다 읽지 걱정하던게 무색하게 1196 페이지의 책이 점점 줄어가는데서 느끼는 뿌듯함은 말로 다 표현이 안되고 이윤기 선생님의 해석으로 만나니 익숙한 신화마저 새롭게 흥미진진하다. 합본판이지만 기존 시리즈의 권수와 차례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어서 권마다 리뷰를 쓰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다섯 권 읽은 것으로 완독수를 표기하지는 못하겠지만 ㅎㅎ

1권 총 277 페이지에 해당하는 내용의 주제어는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다. 나는 여태까지 "이력서"의 한자가 뜻한 바를 몰랐다. 궁금하다고 찾아본 적도 없다. 내가 썼던 이력서의 양식에 한자가 없어서 그랬다고 변명하면 안되겠지? 주제어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아손의 가죽신 한짝이나 16세 소년 테세우스가 아버지를 찾아가기 전 무거운 섬돌을 들어 칼과 가죽신을 찾았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이력서의 履(이)가 신발을 뜻하고 이력서가 "신발을 끌고 온 역사의 기록",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한 장의 종이에다가 기록함"(p38)의 의미를 지녔다는 거였다. 제출할 곳도 없는데 뜬금 이력서 쓰고 싶어지는 이유는 뭔지. 꼴보기 싫다고만 생각했던 서류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이 책을 읽으며 신들의 이력서를 내가 대신 채워보리라는 엉뚱한 각오도 다졌다.

카오스, 혼돈으로 온통 먹먹하고 펑퍼짐했던 온 우주와 온 땅에서 자연이라는 신이 출연하고 어둠과 밤이 탄생하고 하늘과 땅이 떨어지며 따끈따끈하게 만들어진 신세계에서 우리의 신들이 노닌다. 사랑의 신 에로스 이전에 밤의 여신 뉙스가 낳은 거대한 알에서 태어난 그리움의 신 에로스가 있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생산하는 신 에로스는 이 땅에 살아갈 온갖 것들을 낳는데 인간이 밤에 잉태되는 것 또한 모두 이런 에로스 덕분이란다. 저승 주위에 강이 흐르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제우스와 신들이 티탄과 전쟁을 벌인 탓이다. 하데스의 손에 주석 사슬로 묶인 티탄들은 무한 지옥 타르타로스에 갇히지만 이에 안심하지 못한 제우스는 포세이돈에 명해 강을 저승 주위로 흐르게 한다. 포세이돈이 나선 김에 저승으로 바닷길이 열렸어도 좋았을텐데. 그랬으면 짠 망각의 물을 거부하는 혼령들로 저승이 소란스러웠을까? 왕뱀인 남편 퓌톤을 아폴론의 손에 잃은 왕뱀 아내 퓌티아를 인간으로 변신시킨 제우스는 그녀를 아폴론의 예언 사제로 만든다. 하여간에 배려라곤 모르는 신이다. 술의 신 뒤오니소스가 자란 뉘사산이 힌두스(인도) 땅에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의외로 이집트와 인도와 바빌로니아의 색이 섞여있는 경우가 있다. 저승왕 하데스의 별명인 플루토스에는 넉넉하게 하는 자, 뱃사공 카론의 이름에는 기쁨이란 뜻이 있단다. 그리스 사람들의 작명 센스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1권을 끝내며 나오는 말에 앞서 작가는 리바디아를 방문했을 적의 추억 한자락을 꺼낸다. 트로포니오스의 신탁을 받기 위해 마셔야하는 샘물에 대한 이야기다. 레테의 샘물 = 망각의 샘물, 바로 옆에서 솟는 므네모쉬네의 샘물 = 기억의 샘물을 구경하는 중에 시내의 이름이 궁금해 지나가는 그리스인에게 물었더니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단다. "라이프(인생)." 나는 트로포니오스의 샘물 얘기를 듣자마자 이것이야말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본질이구나 싶었다. 읽을 때는 다 알 것고 다 외운 것 같은데 덮고 나면 바로 잊어버리고 가물가물해지는 신들의 이야기. 특히 이름들을 벌써 까먹어가고 있다. 신들의 이력서를 대필하기엔 아직 너무 부족해! 부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196 페이지를 완독할 즈음엔 부족함 없는 이력서들로 신들의 발자욱을 내 안에 기록하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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