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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김동수 감수 / 리리 / 2020년 3월
평점 :
책 받으면 까암짝 놀라요. 822 페이지!! 책 정보로 쪽수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목격하는 상상초월 두께에 심장이 두근두근. 제목이 신들의 봉우리라고 책 높이마저 에베레스트를 따라가나요? 어떻게 된 책이 쉬지 않고 읽어도 페이지가 줄지를 않고 지쳐서 잠깐 휴식했다 잡으면 페이지가 자가증식해 있습니다. 절반쯤 읽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숨 돌리는데 겨우 3백을 넘겼을 뿐이란 걸 알게 됐을 때의 아득함이란. 인간적으로 이 두께는 독자에 대한 범죄 아닙니까? 야이 시간 도둑놈아! 그래도 재밌으니까 용서할게요.
책은 1924년 6월 8일 에베레스트 등정에 지질조사원으로 참여한 오델의 목격담으로 시작합니다. 영국인 맬러리와 어빈이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으리라 예상되던 오후. 오델은 쨍하게 맑아진 하늘 아래 능선을 따라 최고봉으로 전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등정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은 상태로 오델은 베이스캠프로 내려왔지만 어쩐 일인지 맬러리와 어빈은 돌아오지 않고 그들의 성공 여부는 에베레스트만이 답을 아는 미스터리로 남겨지게 되요. 처음엔 맬러리의 미스터리를 쫓는 산악 추리물 내지는 재능이 없어 산을 포기한 젊은 산악인의 성장기인가 했습니다. 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하고 하산한 카메라맨 후카마치 마코토가 맬러리의 것으로 추측되는 코닥 카메라를 발견해 그 카메라의 출처를 찾아나서거든요. 마흔에 가까운 나이, 산을 쫓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일상, 연인의 변심, 이런저런 현실에 압박받은 후카마치가 너절한 삶에 대한 도피로 선택한 것이 에베레스트였고 등정에 실패한 후에도 카트만두를 떠나지 않길래 잘못된 추측을 한 거였어요. 또한 마흔쯤이면 이미 노장 취급을 받고 은퇴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착각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산악인이라고는 무릎팍 도사에 나온 엄홍길 대장님밖에 몰라서 다들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산을 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ㅠㅠ
예상 밖의 전개 속에 등장한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일본의 천재적인 산악인이자 이제는 잊힌 한 남자 하부 조지였습니다. 표고 8000 미터 아래에서 어쩌면 맬러리의 카메라를 처음으로 발견했을 남자, 홀로 에베레스트 정상 또는 근방을 밟은 것으로 추측되는 남자, 산과 지상에서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하게 살아오다 잠적해 버린 하부 조지의 일생을 그가 처음으로 들어간 산악 동호회 임원과 그의 직장 동료와 그의 연인과 라이벌이 남긴 기록으로 파헤쳐가며 후카마치는 점점 하부 조지에 매료됩니다. 산이 좋아서 또한 거기 산이 있어서 산을 타는 게 아니라 내가 여기 있어서 산을 타는 것 말고는 잘할 수 있는게 없어서 산을 탄다는 남자의 선택.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산에 대한 열망과 집념 외에는 삶에 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는 남자의 발악 같은 열망과 산에 대한 처절한 사투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만큼 절박한 구석이 있습니다. 맬러리의 카메라, 료코의 납치, 구르카 용병 대장 등 이야기는 여러 겹의 사건으로 구성되지만 실상 이 책은 하부 조지의 산에 대한 의지가 그를 정상까지 오르고 또 오르게 하는 이야기랄 수 있습니다. 하부 조지의 괴팍하고 어린애 같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수행자처럼 정진정명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쩐 일인지 마음이 한껏 정화되며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후카마치가 카메라의 눈으로 정상의 능선에 매달린 하부 조지를 찾아 해맬 때는 맬러리와 오델의 첫장면이 떠올라 대성통곡까지 했어요. 엉엉ㅠㅠ
목숨 걸고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를 못했어요. 지금도 다 이해 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에베레스트는 위험해요. 책으로 간접 경험했을 뿐이지만 아마 저 같은 사람은 에베레스트의 절반만 올라도 숨 한번 잘못 쉬어 골로 갈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위험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하부 조지는, 또 많은 산악인들은 산으로 떠납니다. 뉴스에서 이런 모험가들의 얘기를 들으면 무모하다, 어리석다, 가족 생각은 안하는가봐 쯧쯧 혀를 차고는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도저히요. 산에 대한 간절함, 혼이 다 닳듯이 오르고 내리는 의지 앞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페이지였는지 쪽수를 찾을 수 없어 옮겨쓰지는 못했지만 인간에게는 죽음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가 아닌 것 같아 한 5분 열심히 뒤져서 찾았습니다. "인간에게는 권리가 있다. 무엇을 뺏기든, 무엇을 잃든,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남겨진 권리. 그건, 자신의 선택한 삶의 방식에 생명을 걸어도 된다는 권리다."(p776) 후카마치의 말이지만 하부 조지의 마음 속에도 꼬옥 이런 결심이 서있었겠지요. 생존에 대한 욕구보다 강렬한 의지에의 직면, 이것이 신들의 봉우리가 주는 가장 큰 감동입니다.
본인 입으로 산악소설 광이라고 말하는 평론가 기타가미 지로마저 언급하는 산악 소설이 몇 없는 것으로 보아 꽤나 매니악한 소재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저로써도 처음 만나는 소재의 책이었는데요. 그 처음이 이 책이라 다행이고 굉장했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어요. 참고로 음양사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작가님의 이름을 몰라서 같은 작가님이라는 사실을 후기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작가님 취향이 애처로운 남자가 뭔가를 갈구하는 얘기라는데 이 책이 딱 그런 책입니다. 쓰다 남긴 건 없다는 후기 앞에서는 인간적으로 여기서 더 쓸 게 남았다고 하면 사람도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