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에 미쳐서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이놈의 오사카, 진짜 지긋지긋해!" 하수구 덮개판을 쾅쾅 소리나게 밟으며 울화통을 터트리고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름은 지사토, 나이 스물도 전에 청상과부가 되어 고향도 아닌 오사카에 홀로 남겨진 여인넵니다. 지금으로치면 아이들 공부방과 같은 습자소의 강사로 근무 중인데요. 에도 출신이다 보니 오사카 사투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 애를 먹고 있어요. 콩알만한 어린애들이 말투를 두고 어찌나 꼬투리를 잡고 놀려대는지요. 물론 그때마다 휘둘리는 지사토도 문제지만 약이 바짝 올라 어린애들이랑 대거리하다 강습소에 잘린 게 이번만 벌써 세.번.째. 가르치는데는 영 소질이 없는 게 분명한데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어디 쉬워야 말이죠. 여윳돈이 있거나 잠시 기댈데만 있었어도 좀 길게 내다보고 일을 살필 수 있을텐데 얄미운 올케를 생각하면 굶어죽어도 친정엔 발걸음 하고 싶지 않구요. 상인집안 딸을 어찌 며느리로 삼느냐며 노발대발하던 시집은 아들이 죽자 약간의 저축 마저 빼앗은 채 칠일만에 지사토를 내쫓았어요. 빈털털이라 에도에 돌아가 남편 성묘도 못하는 처지에 또 백수가 되다니, 에고에고.

습자소의 늙은 강사에게 다다미 값, 숫 값까지 탈탈 털리고 돌아오는 길. 빨래터의 부인들이 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요. "큰일 났어요 강사님. 댁이 털렸어요!" 도둑질 할 데가 없어서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내 집을 털다니! 지사토는 대성통곡이라도 하고픈 심정인데 엎어진 놈 꼭 뒤 찬다고 관리인까지 월세를 내라고 쫓아옵니다. 지사토는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지긋지긋한 오사카놈들아! 네들은 인정이란 것도 없지!! 이 얼간이 벽창호 같은 놈들아!! 속마음을 빼액 지른 것까진 좋았는데 아뿔싸, 관리인이랑 같이 있던 남자가 집주인 가와치야의 큰도련님 세이타로였지 뭡니까. 오사카 토박이 큰도련님이 지사토의 어깃장에 마음이 상하여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선하였으니 그곳은 다름 아닌 천하의 주방 오사카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야채 도매상 가와치야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이 상한다면 재벌 앞에선 꼭 욕을 하는 걸루 해요 우리!! 건물주 아들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대기업(?) 대표의 아들이기도 했던 세이타로와 세이타로 어머니 시로의 직속하녀로 취업하게 된 지사토. 지역 감정 장난 없는 에도녀와 오사카남. 그것도 한쪽은 진중한 사무라이 남편과의 사랑을 고이 품고 사는 과부, 한쪽은 오사카 제일 가는 기생 고만과 사방팔방 염문을 뿌려대는 중인 철딱서니 없는 재벌남이고 보니 이 사랑 어떻게 흘러 갈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둘은 <야채에 미쳐서> 헐레벌떡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랍니다.

에도시대 오사카를 배경으로 한 시대물입니다. 1800년대 초반, 오사카에 실제로 존재했던 청과물시장 도매상들과 농민의 격렬했던 노점 허가 대립을 배경으로 한 상업물이구요. 로맨스 소설이기도 해요. 금난전권의 폐지 등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 배경이 썩 낯선 것도 아니라서 일본의 시대물이라도 읽는 게 그리 힘들지는 않더라구요. 주석 등이 많아서 좀 귀찮기는.... 크흠, 아, 아닙니다 ㅋㅋ. <야채에 미쳐서>를 읽으며 읽는 내내 입맛을 똑똑 다실 때가 많았는데요. 남주 세이타로가 제대로 야채성애자다 보니 대파 한쪽 뜯어먹고도 입맛 도는 찰진 묘사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지사토가 또 한 먹성하여서 세이타로와 어울려 이것저것 맛있는 걸 엄청 먹으러 다니는데 요즘으로 치면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우동 먹는 장면, 캬아, 이 소설의 명장면으로 저는 그 우동집을 꼽겠습니다. 한겨울 찬바람 쌩쌩 부는데서 안경에 김 뿌옇게 서리는 뜨뜻한 가게 들어가서 우동 먹고 싶었어요. 입맛을 찹찹 다지며 사연 많은 두 남녀가 이러뛰고 저리뛰고 동분서주 하는 걸 보고 나면 엄청 배고파집니다. 오이라도 하나 들고 읽으십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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