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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ㅣ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북상하는 것. 고기압, 벚꽃, 누군가의 부음. 남하하는 것. 황사, 파업, 쓰레기."(p9)
대지진, 허리케인, 핵 누출, 경제 재앙, 쓰나미, 대홍수, 화산폭발, 시위. 전세계 이곳저곳에서 발생하는 재난이 축복인 회사가 있다. "정글", 타인의 불행 정도가 아니라 한 지역구 한 국가의 불행을 여행 상품으로 만드는 회사다. 십 년 째 정글에서 근무 중인 수석 프로그래머 요나는 그러나 대지진도 쓰나미도 신경쓸 겨를이 없다. 오죽하면 별명까지 김좆광인 팀장놈이 요나의 엉덩이를 주물럭대는 것으로 삶을 밑바닥부터 흔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이 늘 퇴물만을 성추행 한다는 사실은 회사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요나는 자신에게도 퇴물이라는 옐로카드가 붙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추행을 당했다는 충격에 앞서 퇴물로 내쳐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감정을 지배했다. 김 팀장의 피해자들이 단체행동에 나설 때 요나가 그들을 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추레한 패배자로 낙인 찍히는 수치를 감당하지 않겠다는, 이제와 회사 밖에서 삶을 재정립할 자신도 없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내려온 한달여의 휴가. 퇴사를 언급한 그녀에게 내려진 휴가 결정이 요나는 회사의 인정처럼 느껴져 안심이 된다. 출장 명목의 휴가에서 요나는 무이를 선택한다. 카누족과 운다족의 학살, 이제는 호수가 된 사막의 싱크홀, 무엇보다 프로그램 중 가장 값비싼 여행이라는 것이 선택의 이유가 되었다. 요나는 곪아터지기 직전의 현실을 이 여행으로 떨쳐낼 수 있을까?
"재난은 그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p122)
일견 잔인하게도 느껴지는 재난 여행의 목적은 분명하다. "충격→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 내 삶에 대한 감사→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우월감"(p61) 무이에서의 5박 6일 일정도 그 목적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음주와 숙취로 요나가 비행기를 놓치고 여권도 잃어버린 채 떠났던 무이로 돌아오지만 않았다면, 가이드와 제대로 연락이 닿았다면, 도움을 구하기 위해 전화한 대상이 김 팀장이 아니었다면, 요나는 이상한 나라와도 같은 무이의 재난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발 좀. 우리도 휴일은 필요하다고."(p95)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루밤도 안되는 시간을 떠나 있었을 뿐인데 무이는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변해있었다. 재난으로 두 다리를 잃은 아코디언 연주자가 멀쩡히 서서 골프를 치고 있다. 엄마를 잃은 슬픔으로 관광객을 엄마로 착각한다던 여자애는 해맑게 놀다가 요나를 보고 달아난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수상가옥을 관광객들의 홈스테이로 제공하던 슬프고도 억척스러운 삶의 여자는 멀쩡히 대문 달린 집 안에서 텔레비젼을 시청 중이다. 정글의 프로그램 개발자인 요나조차 놀라버린 재난 테마파크의 다양한 풍경들이 나는 이 소설의 핵심인 줄 알았다.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남은 페이지가 너무 많은 것에 의아해하다 폴사의 노란트럭이 노인을 치는 장면을 마주한다. 트럭은 쓰러진 노인을 다시 타 넘어간다. 요나가 그 모습을 목격했고 운전자의 일행은 그런 요나를 목격한다.
"북상하는 것. 저기압, 장마, 누군가의 부음. 남하하는 것. 파업, 쓰레기, 이야기."(223)
무이는 재난체험센터가 아니었다. 놀이공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아닐 예정이다. 사람들의 흥미로부터 완전히 멀어져버린 옛 재난을 버리고 더 큰 재난으로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무이의 음모를 마주한 요나. 요나 앞에 갈래길이 나타났다. 떠나거나 무이의 새 재난 프로그램에 몸담고 정글에서 기상회생 하거나. 책을 읽어가면서 내가 원하는 결말이 뭔지 알지 못했는데 결말을 보고서 이게 내가 딱 바랬던 결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 안에서도 문 밖에서도 정글을 마주하는 쓸쓸하고 서글픈 인간군상, 나는 그들을 동정하는 이상으로 분노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윤고은의 채찍 같은 결말이 이토록 아픈 것은 내가 그 군상의 일원이어서일테고. 이제까지 만난 모든 재난물들과 다른 결로 율동하는 소설이다. 인생이란 재난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독자라면 요나의 험난한 여정 앞에 이기적이지만 충분한 위안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