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방콕 ㅣ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고통은 신이 주는 게 아니야. 인간이 만드는 거지."(p32) 창녀에게 옮은 에이즈로 아내를 죽인 훙의 아버지가 그랬다. 누군가 넘어져서 땅이 파인 자리에는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또 넘어지게 되는 법이라고. 그 창녀는 나쁜 년이 아니며 이건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탱크 부품을 만드는 한국의 공장에서 훙은 손가락 세 개가 잘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훙은 아무 원망도 하지 않았다. 허드렛일이라도 하게 해줬으면, 작은 돈이나마 계속 벌게 해줬으면, 홍이 바라는 댓가래야 고작 그뿐이었는데도 윤 사장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내가 보고 있기 속상해서 그래요, 뻔뻔한 한 마디에 훙은 쫓겨난다. 그리고 결심한다. 한국을 떠나겠다고. 그러나 그냥 가지는 않겠다고. 누군가 넘어져서 파인 땅에는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넘어지게 마련이므로 이번에는 내가 너희를 넘어뜨리겠다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세계만을 알았던 유순한 아가씨, 윤 사장의 딸 파이니스트 정인이 팔다리가 묶인 채 몸부림 친다. "너는 나를 알아야 해." 훙과 똑같은 모양새로 제 딸이 주저앉을 줄 알았다면 윤 사장의 선택은 달랐을까.
"세상에는 싸워야 할 대상이 너무 많은데 자기 자신의 삶조차도 그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부당한 일이라고"(p245) 와이는 벤의 딸이 차라리 죽어버리기를 바란다. 다정한 아버지인 벤은 약혼자인 정우와 함께 태국을 방문한 섬머에게 카드에서 이기면 캐나다의 집을 물려주겠다고 바람을 잡는다. 누가 봐도 일부러 져주는 것이 확실한 태도, 당신 너무 취했다며 와이는 벤을 말리지만 벤은 이미 카드를 뒤집은 후다. 아버지뻘의 남자와 살림을 차린 자신이 누군가의 눈에는 창녀처럼 비칠 것을 안다. 어쩌겠는가. 이게 방콕의 여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노골적인 미국남자, 뒷통수 치는 영국남자, 매너 좋은 독일남자, 무책임한 한국남자, 여자 등쳐먹는 베트남 남자. 와이는 캐나다 남자 벤을 보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운이 좋지. 그러나 와이의 불룩한 뱃속의 아이에게 벤은 무관심하다. 당신 아이라는 말에도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아이를 낳아 발목을 잡을 수만 있다면. 벤과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와이는 욕망하고 벤은 외면하며 사진 속 섬머는 환한 미소로 와이를 비웃는다. 와이는 벤의 책상 서랍에 총이 있는 걸 안다. 와이는 섬머의 사진을 덮어버린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이 뭐라고 생각해?"(p49) 한국은 사육용 개들을 대하는 태도가 악마적이라고. 개 맛이 어땠냐며 정우를 괴롭히는 섬머는 동물보호센터에서 매니저로 근무하며 전세계의 학대받는 동물을 구조한다. 한국의 농장에서 데려온 60마리의 개들을 입양시키며 섬머는 얘기한다. 윤리의 안테나를 세워야 해. 검지를 뿔처럼 머리에 올리며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피라고 말하는 섬머는 사랑스러웠지만 정작 그녀는 알지 못한다. 제 아버지가 와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와이가 낙태한 아기가 하얀 비닐봉지에 쌓여서 어떻게 신전 밑에 묻히게 되었는지. 애는 또 낳으면 된다고 와이를 위로하며 벤이 얼마나 빠르게 와이를 안았는지. 의식하지 못할 뿐 언제나 가해자가 생기고 피해자가 생긴다는 벤의 말을 섬머는 헛소리로 치부한다. 섬머가 쏟아내는 말 앞에 와이의 대꾸는 한 가지 뿐이다. "넌 아무 것도 몰라."(p190)
"내가 자꾸 같은 얘기를 빙빙 돌려서 하는 것 같다면,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소. 모두 다"(레이먼드 챈들러, 빅슬립, 북하우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024번은 김기창 작가의 장편소설 <방콕>이다. 에디터 김아름은 방콕을 두고 소설 속에 설치한 카메라가 몇 대쯤 될까 궁금하다고 했는데 나도 그랬다. 한국으로 베트남으로 캐나다로 방콕으로 흩어졌다 모여드는 인물들의 삶에 맞춰 하나씩 카메라를 돌린 느낌이랄까. 고작해야 334 페이지. 젊은 작가 시리즈를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판형이 크지도 않은데 이만한 분량에 이 많은 이야기를 다 녹여냈다는게 믿기지가 않는다. 한국에서 잘려나간 건 손가락이 아니라 나의 존엄이었다는 훙, 훙에게 갈취당한 자존을 어떻게해도 되찾을 수 없는 정인,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깨달음 후에도 복수밖에 생각하지 않는 윤 사장, 자유와 방탕을 즐기기 위해 천사의 도시를 방문한 벤, 자유를 향해 기꺼이 몸을 파는 와이, 인간에게도 다양한 층위가 있음을 알지 못한 섬머, 동생에게 생긴 일도 엄마가 찾는 남자에 대해서도 섬머와 벤을 맴도는 추격자의 존재에도 무지한 정우. 방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연쇄적인 재앙 앞에서 겁먹지 않을 독자가 한명이라도 있을까. 타인의 불행은 막연하다. 어떤 파탄이 눈앞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현실감이 없다. 타인의 불행이 내 양심의 가책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파탄의 결과가 내 눈을 찔러야 한다. 그렇게 찔린 자들의 통곡이 김기창의 방콕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