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는 없다
테일러 애덤스 지음, 김지선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엄마 지금은 괜찮으셔."(p22) 언니 데번이 보낸 문자를 본 다비의 손이 수전증 환자처럼 덜덜 떨린다. 추수감사절 마지막 통화에서 다비는 엄마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 진심도 아니었다. 진심의 일말도 내보이지 않은 채 칼로 쑤시듯 엄마를 상처줬다. 그런 엄마가 수술 중이다. 어쩌면 오늘 밤 엄마는 고비를 넘기지 못할지도 몰랐다. 목전에 닥친 엄마의 죽음 앞에 다비는 스노체인도 걸치 않은 채로, 앞창 와이퍼를 수리하지도 않고서, 연료탱크를 꽉 채우지도 못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지금 함박눈이 펑펑 내려 도로 표시선마저 가려진 길 위에서 다비의 혼다는 가동을 거부하려 한다. 휴대폰 배터리는 채 한 칸도 남지 않았다. 구조 요청을 하려 해도 신호조차 잡히지 않는다. 녹색 표지판에 적힌 "마지막 인명사고 이후 365일"의 글자는 내일이면 다비로 인해 수정하게 될까. 얼어죽기를 각오하던 다비의 눈에 녹색 표지판 뒤 또다른 표지판이 비쳤다. "앞에 휴게소 있음". 와나파(작은악마)의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다비는 혼다를 몰고 간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따금씩 신은 사람들을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보내시지. 정작 본인들은 모른다 해도."(p415) 7번 주간고속도로에서 조난을 당한 다섯 명의 외부자들이 와나파로 몰려든다. 염소수염의 수의사 에드, 가족을 방문할 목적으로 에드와 함께 길을 나선 사촌 샌디, 한때는 마술사였으나 현재는 회계학을 전공 중인 에슐리, 여드름투성이 얼굴로 내내 다비를 응시하는 소년 라스. 누굴까? 이들 중 도대체 누가 회색 밴의 주인일까?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낡은 차에 쇠창살을 두른 우리를 만들어 어린 아이를 가둔걸까? 순전히 우연이었다. 엄마의 무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영하 15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다비는 휴게소를 뱅뱅 돌며 신호를 찾는다. 그리고 낡은 밴의 뒷창으로 비친 어린 아이의 실루엣을 알아본다. 드웨인 존슨이나 아놀드 슈왈제네거, 브리 라슨이라면 또 모를까. 그리는 재주 말고는 아무 힘도 없는 미술대생 다비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모르는 척 할까? 구조대가 도착한 후 신고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그 사이에 저 어린애가 얼어죽는다면? 신고받은 경찰이 출동하기 전에 납치범이 밴을 끌고 사라진다면? 두려워하며 망설이는 사이, 다비는 자신도 모르는 새 여자아이를 목격했다는 너무 많은 증거를 밴 주위에 흩뿌린다. 범인은 다비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러나 다비는 범인을 특정지을 수 없다. 밴이 누구 소유인지 알 수 없으므로. 차주를 매칭시킨대도 위험은 여전하다. 총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는 범인은 목격자를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뿐이라는 사실을 다비는 깨닫는다. 오늘밤 아이를 구할 수 있는 건, 다비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휴게소의 무고한 손님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다비 자신 뿐이다.

"저 웃음, 저게 멍청한 악의 얼굴이구나. 저게 캘리포니아의 한 마을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한 자의 얼굴이야."(p100) 눈보라 치는 밤 어린 소녀를 구하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작은 영웅의 용기 앞에 내내 숨죽이며 읽게 되는 책이다. 무기라고는 양말에 집어넣은 콘크리트 조각 하나, 이혼하고 집을 나간 아버지가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보내온 공구상자 뿐. 총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이 무기 앞에서는 황당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강제 밀실화된 휴게소 안에서 아는 자와 알아챈 자와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벌이는 혼돈으로 긴장감은 폭발했고 범인과 다비의 쫓고 쫓기는 추격 앞에선 손에 땀을 쥐었다. 누군가는 꼭 다비 엘리자베스 손과 같을 것이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한점 망설임 없이 강으로 뛰어들고 불이 난 아파트를 오르내리며 잠들어 있는 주민들을 깨운 의인들은 꼭 다비와 같았을 것이다. 홀로 달아나지 않고 뚝심있게 불운에 대항했을 것이다. 주저 앉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죽음에 대항한 다비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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