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산다는 건 바다 위에 떠다니는 배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p13)" 보라보라 섬에 살고 있는 서른 다섯 태연씨의 이야기입니다. "산호초, 형광색 립스틱을 바른 대왕 조개, 숨어 있는 물고기들 그리고 작은 동그라미"(p20) 인어공주의 한 장면인가 싶게 사랑스러운 프로포즈를 받은 태연씨. 뽀글뽀글 거품 웃음을 터트리며 물 속에서 동그란 반지를 손에 낀 그녀는 그렇게 이국의 섬 보라보라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9년 동안 보라보라 섬과 한국 간혹 일본과 미국, 아이슬란드를 오가며 태연씨가 겪은 일들과 생각을 기록한 건데요. 여태 제가 읽어온 모든 에세이를 통틀어 가장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기운차고 웃음이 나는 책이었습니다. 딱히 누군가를 위로할 목적으로 쓴 것 같지는 않은데 글 속의 모든 느낌이 어쩜 이렇게 포근한지. 침대에 누워 읽는데 조금 과장해서 이불이 필요없겠더라구요. 책이 따끈따끈, 난로 같았거든요 ㅋㅋ

"어디든 더하기만 있거나, 빼기만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늘 까먹으니 문제지."(p118) 보라보라 섬을 검색해 본 사람들은 섬생활을 천국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실은 독자인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네이버에 검색을 하니 그림 같은 바다가 쏟아지더라구요. 언제든지 바다에 뛰어들어 자맥질 하는 삶만 상상했지 보라보라 섬에서의 월세, 장보기, 병원가기, 직장 찾기, 피자집 개업하기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보라보라 섬에서도 여전히 통장을 스쳐지나가는 월급 같은 건 더더욱이요. 배경이 판타지라고 그 속에서 영위하는 일상까지 판타지는 아닌데 매번 그걸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프랑스어로 도통 설명할 수 없어서, 9년을 살아도 여전히 외부인을 보듯 하는 섬사람들과 마주하며, 비행기에 실려 섬 밖의 응급실에 실려갔다 온 날 남편이 차려준 미지근한 오렌지 주스와 콘플레이크 앞에서 태연씨는 막연히 가족과 모국어가 그리웠다고 합니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이곳에서의 모든 삶이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냉정해지기도 하고요. 그것이 합리적인 생각이 아닌 줄을 알아도 한국에 남았다면 삶이 달랐을 것 같은 그런 거. 그러나 돌아서 잊고 다시 그곳에서의 삶에 집중하게 해준 것이 있었습니다. 줄창 빼기만 계속되던 하루를 번쩍 들어 더하기 해준 그것!을 생각하니 저도 침이 고이는군요. 블레즈 파스칼의 말이 그것!과 정말 알맞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소한 일이 우리를 위로한다. 사소한 일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나의 가난을 핑계로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이들의 낭만을 비웃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다른 이의 낭만을 비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괜찮은 어른이 되는 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p16) 남편에게 돈이 들어간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친구 나즈. 돈을 모으기 위해 나즈는 틈틈히 여행자들의 빨래를 합니다. 단 하룻밤, 다른 조용한 섬의 숙소를 예약하는데에 모든 돈을 쓴 걸 알았을 때 나즈를 몰랐다면 태연씨는 생각했을 거라고 해요. '고생하고 모은 돈인데 그렇게 다쓰면 어떡해'.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서른을 훌쩍 넘어 다시금 영화를 시작하려 대학원에 갔다는 태연씨를 보고 저는 생각했을 겁니다. '부럽다, 모아둔 돈이 많나봐' 이건 배아픈 생각이고요. '대책없다, 20대도 아니고 서른도 중반을 넘겨 저게 가능한 얘기인가' 이건 걱정을 가장한 오지랖입니다. 꿈도 없고 한 달 벌어 다음 한 달 살기도 빠듯한 내 생활의 가난, 내 마음의 가난으로 태연씨의 낭만을 비웃었을 거에요. 처음 시작하는 이야기부터 총맞은 것처럼 부끄러웠는데 창피함보다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태연씨부터가 스스로를 질책하기 보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하고 책 구석구석에서 안도해서 인 것 같아요. 그 안도감에 저도 같이 물드는 거에요. 푸른 바다도 수영 잘 하는 남편도 언제나 믿어주는 부모님과 사이 좋은 언니도 부럽지만 무엇보다 부러운 건 태연하고 다정한 태연씨의 마음입니다. 어쩜 이름도 김태연인지... 하고 생각하는 이런 거 이성한테 반한 초기 증상 아닌가요? 배우자도 있는 사람에게 이러면 안되는데 곤란하군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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