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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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씨에게

 

안녕하세요 제야씨. 10월의 새벽이 추워서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옹송그리고 책상에 앉았다가 고민 끝에 이 편지를 씁니다. 제야씨에 대한 글을 읽고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제야씨가 제니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나도 제야씨에게 편지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야씨가 찢어버리고 싶었던 오늘에서 십년도 더 지난 2019년에 나는 제야씨를 만났습니다. 제야씨가 겪었던 잔인한 일들을 들었어요. 당숙, 외딴 컨테이너 박스, 비오는 밤, 담배와 술, 오물이 묻은 교복과 연결되지 않는 전화.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그날의 일에 제야씨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갖다 붙인 변명에 나도 함께 화가 났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해 남자를 편드는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그 말들을 제야씨와 함께 불지르고 싶었어요. 남자가 꼴리면 그럴 수 있다, 네가 알아서 잘 피했어야지, 돈이 얼마나 많은데 저런 애를, 애가 발랑 까져서 지가 먼저 꼬셨겠지, 담배 피고 술 마시고 안봐도 빤하다.. 반면에 피해자였던 제야씨는 편드는 말 한 마디 들을 수가 없었죠. 고작 한다는 소리가 조용히 살 것이지, 부끄럽지도 않나, 기집애가 겁도 없이 였으니 상처를 염장하는 기분이었을까요. 제야씨가 그자를 칼로 찔러버렸대도 나는 이해했을 거에요.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생각했습니다. 아무 책임도 져줄 수 없으면서 이런 생각, 참 볼품 없지요?

 

그놈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지요? 같은 동네에 내도록 살며 여전히 유지 행세를 한다고요? 젊은 아내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고요. 제야씨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해 아둥바둥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날에서 한발짝 뗐다가도 되돌아가기 일쑤인데, 고향도 가족도 잃었는데 어째서 그놈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렇게 잘 사는 걸까요? 왜 우리 사회는 그런 놈을 잘 살게 그냥 놔두는 걸까요? 그놈이 악마같은 짐승 새끼라 그런걸까요? 우리 사회가 그놈과 다름없이 사악해서 그런걸까요? 제야씨도 그놈과 똑같은 짐승새끼가 되었으면 차라리 괜찮았을까요? 도무지 답이 없는 문제에 책을 덮고 싶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싶어서요.

 

제야씨를 생각하면요. 언젠가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부끄러워져요. 밤 늦게 나가지 말지, 외딴 길로 가지 말지, 대체 낯선 어른이랑 그것도 남자랑 왜 술을 마신 거야? 뭘 믿고 그런 거야? 뉴스를 보며 나도 분명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딴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거란 생각에 나온 말이었지만 제야씨의 귀에는 그 말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듭니다. 많이 미안합니다. 정말로 많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어요. 그날의 일을 비밀로 하지 않겠다 결심하는 세상의 숱한 제야씨를 응원할게요. 말하고 다시 말하고 또 말하는 내용에 귀도 기울이겠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불편하다고 외면하지 않고 작은 마음이라도 보탤게요. 모르는 척 눈감지 않을게요. 당신이 목소리를 높이면 그 곁에 서려고 노력할게요. 그거 아십니까? 제야씨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빨갛고 시원하게 동터오는 느낌이 든다는 걸요. 여행 잘 하고 오십시오. 여행 중에도 여행 끝에도 꿋꿋하십시오. 무엇보다 건강하시기를 마음으로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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