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설득
메그 월리처 지음, 김지원 옮김 / 걷는나무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예일대에 합격할만큼 똑똑한 그리어지만 어쩐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기숙사에서 만난 지와 함께 사교 클럽 파티에서 술을 마시던 새학기의 첫 주말. 잘 알지도 못하는, 실은 생전 처음보는 남학생이 그리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어는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그 어떤 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남학생은 혼자 우쭐대더니 거절하는 그리어를 희롱합니다. 그리어는 깜짝 놀랐고 화가 났지만 "이거 놔" 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분노도 표출하지 못합니다. 너무 놀라 오히려 말도 하기 힘들었을 정도죠. 알고 보니 그는 꽤 상습범이었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 다른 여학생에게 혼쭐이 나며 학교의 징계 위원회까지 회부되지만 퇴학이라는 예상된 징벌을 비켜갑니다. "이성의 신호를 읽는 능력이 부족했던 점이 부끄럽고 사회적 신호를 반복적으로 착각한 점을 사과하고 싶다"는 진술서 한 장으로 용서 받습니다. 그가 받은 불이익이래야 세 번의 상담 뿐. 그리어는 억눌렀던 분노가 터져나오는 걸 느낍니다. 그러나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건 아는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던 때에 예순을 훌쩍 넘긴 성공한 여성운동가 페이스 프랭크의 강의를 듣게 됩니다. 페미니스트의 역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고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지적이고 매력 넘치는 이 힘있는 여성은 그리어의 삶에 껑충 뛰어들었습니다. 순식간에 숭배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페이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전복시키며 이후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지요. 자발적인 종복으로서 그리어의 삶은 페이스에게 예속되지만 그리어의 생각만큼 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여성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걸까요?

제목이 직접적으로 표출하다시피 이 소설의 큰 뼈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입니다. 여성에 대한 만연한 혐오,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적의, 동지애를 갖지 못하는 여성들의 비웃음 또는 변절, 동의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한 무기력,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에서는 언제나는 배제되는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표출합니다. 그러나 소설의 뼈대를 받치는 탄탄한 근육들을 이루는 이야기, 이 소설을 명백하게 재미있게 만드는 건 그리어와 주변 인물들의 사랑과 우정, 연대, 무엇보다 성장입니다. 어른답지 못한 부모로부터 방치된 채 커야했던 그리어는 명문대에 합격하고도 변두리 대학에 떨어졌다는 좌절감 속에서 남자친구 코리와 존경하는 여성 페이스와 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 미성숙한 청춘입니다. 동성애자인 지는 여러 여성들을 전전하며 도착적이고 불안한 애정사를 구축하고 있지요. 불행한 가족사로 삶이 급속히 좌절된 코리는 그리어의 쌍둥이 로켓선 같은 존재에서 전남친으로 남기를 선택한 후 마약에 손을 댑니다. 혹독한 시절을 살아내며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으나 충분히 나이를 먹었고 그리하여 피곤한 페이스는 불법에 격렬하게 맞설만한 힘이 없습니다. 겹겹이 쌓인 여러 인물들의 삶이 말하고자 하는 한결 같은 주제를 저는 페미니즘이 아닌 "관계"라고 이해했습니다. 여성과 여성이, 여성과 남성이, 여성과 사회가 관계 속에 영향을 끼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이야기라고요. 목소리를 높이고 목소리를 포옹하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이야기라고요. 재미있기에 읽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재미 속에서 동의할 수 있는 더 큰 의의를 발견하면 더욱 좋겠고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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