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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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 호텔의 로빈슨 크루소 같았던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에이모 토울스의 두 번째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홀딱 반해버린 내가 그의 전작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2013년 은행나무에서 발간된 그의 첫번째 소설 <우아한 연인>을 확인했을 때의 기쁨이란. 그러나 구매 버튼을 눌러도 소용이 없었으니 18년 모스크바의 신사가 출간됐을 즈음엔 각 서점에서 그의 첫책이 절판되어 찾아볼 수가 없는 탓이었다. 은행나무에 문의를 드리고 전화를 달라는 답변까지 받았으나 나의 정열이 나의 수줍음을 앞서지 못하여 불발. 우아한 연인은 읽고 싶은 책 목록에만 적힌 채 내내 마음 속에만 간직된 채였다. 모스크바의 신사가 이토록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니 꼭 재간되리라는 믿음과 함께. 그리고 꼬박 일년이 지나 모스크바의 신사를 출간했던 현대문학에서 모스크바의 신사와 똑같은 스타일의 표지와 사양으로 우아한 연인을 새로이 출간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충성할게요 현대문학!!

팔다리가 붙은 별빛 같은 모습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던 이브 로스. 미국 중서부 출신의 이 놀랄 만한 미인과 함께 케이티는 뉴욕의 하숙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러시아 이민자인 아버지의 밑에서 근면하고 소박한 삶의 소중함을 배운 케이티와 남의 명령에 휘둘리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겪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브 로스의 탄탄했던 우정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한 남자의 등장 때문이었다. 팅커 그레이. 갈색머리, 감청색 눈, 추운 겨울의 공기에 양빰이 작은 별모양으로 붉게 상기된 아름다운 남자. 그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적어도 500 달러는 넘을 게 틀림없는 캐시미어 외투를 걸친 채 자신만만하고 훌륭하고 비싸 보이는 포장을 둘러쓴 남자. 1938년을 하루 앞둔 37년의 신년 전야 속으로, 케이티와 이브의 삶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온 남자의 양팔에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순간 대공황의 청춘들은 사랑의 혼란과 갈등에 휩쓸리게 된다. 지나친 음주, 지나친 흥분, 지나친 몰입, 지나친 경쟁. 사랑의 신이 케이티의 손을 들어주는 것만 같은 순간 자동차 사고가 났다. 이브의 몸이 차창을 뚫고 허공을 날았다. 별과 같던 모습은 간데없이 한쪽 얼굴이 짓이겨지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됐다. 운전자였던 팅커는 온전히 이브를 책임지길 원한다. 관대한 남자다. 케이티는 또한 판도가 바뀐 게임에서, 아니 더는 게임이 아닌 세 사람의 관계에서 조용히 빠져나간다. 스케이트를 타도 될 것만 같은 다이아몬드, 유럽행 증기선 표, 러시아의 호텔, 프랑스의 푸르른 해변에서 이브와 팅커가 함께 할 때 케이티는 새로이 구한 자취집에 홀로 남아 땅콩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먹고 혼자 4인분의 카드 놀이를 하고 출근 후엔 플란넬 스커트가 닳도록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5천 쪽 분량의 구술을 받아 적는다. 어떤 일탈을 시도해도 삶이 지긋지긋하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연인들의 흔하디 흔한 삼각관계인가 했던 초반부를 지나면 이 지긋지긋함을 떨치기 위한 케이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건 사랑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또한 우정을 밀쳐내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케이티는 승진을 얘기하는 법률 회사에 사표를 쓴다. 다시 한층 위의 출판사에 취직한다. 부엌에는 프랑스 책들을.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서사시들은 욕조에. 월트 휘트먼의 시집들은 창턱의 책더미에. 영국 소설들은 방안에. 침대 밑에는 러시아 작가들을 쌓아놓고 사는 여자에게 가장 걸맞는 자리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것이다. 그녀는 이제야말로 자신의 책들을 달나라까지 쌓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때에 장애와 사치라는 인생에 매몰될 것만 같던 이브 또한 삶에서 팅커를 분리한다. 제게 맞지 않은 길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럼에도 화려하고 편리한 인생을 망설임 없이 떨쳐내는 이브의 용기는 또한 얼마나 인상적인 것이었는지. 우아한 연인은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짚은 여성 케이티와 이브의 진취적인 모험담이다. 자신들의 북극성을 보고 고고히 쫓아가는 여성들의 삶에 감화된 팅커 그레이의 방향을 찾아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프랑스 피츠제럴드 상을 수상하며 개츠비와 함께 거론됐던 작품이지만 굳이 위대한 개츠비와 비견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나는 제인 에어를 더 많이 떠올리기도 했고 말이다. 뉴욕의 가을겨울에 매혹 당하고 상류층의 화려한 소비에 동경이 일고 엇갈리는 젊은 사랑들에 안타까워 하다 소동의 끝을 마무리 할 때마다 등장하는 헤밍웨이, 애거사 크리스티,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의 고전문학들에 위로 받으며 읽다 보면 새벽이 오는지도 모를 정도다. 실은 이 리뷰도 완전히 비몽사몽 중에 쓰고 있다. 얼른 소개하고 싶어서. 얼른 함께 읽고 싶어서. 이 좋은 책을 지금 혹시 나만 읽고 있는 거면 어쩌나 아깝고 안타까워서.

팅커가 케이티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한참을 돌고 돌아 케이티가 팅커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 케이티의 완벽한 60초와 모자를 쓰지 않고 카페의 유리문을 두드리던 남자를 찾아 다시 페이지를 돌린다. 그래, 실패한 사랑도 시작은 이렇게나 설레이는 것이었지. 가슴이 시린데 또한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 사랑도 똑똑,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도 좋을 것만 같은 아침. 책을 덮으면서 한숨도 자지 못한 지난 밤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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