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 - 말보다 확실한 그림 한 점의 위로
조안나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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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우울하거나 한없이 땅을 파고 싶어질 적에 나는 책을 펼친다. 신간일 때보다는 좋아하는, 그래서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인 경우가 많다. 빨강머리 앤, 초콜릿 공장의 비밀,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키다리 아저씨,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자기 앞의 생.

 

초록 지붕 집에서 원하던 아이가 자신이 아님을 알고 앤이 울며 잠들던 밤과 지난 밤을 까맣게 잊은 듯이 기쁘게 맞이하기로 결심한 6월의 아침 속에 기지개를 켠다. 찰리의 주린 뱃속에서 찰랑거렸을 초콜릿 한 컵을 맛본다. 대굴대굴 굴러 제임스와 친구들을 망망대해의 모험으로 이끈 보솜보솜한 복숭아를 상상한다. 높은 창문 앞 여닫이 책상에 앉아 기숙사 밖 경치를 감상하고 편지를 쓰고 매일 더 의연해지자 결심하는 주디와 만난다. 삐삐가 부엌 바닥에 쏟아놓고 하나하나 헤아리던 금화를 만지작댄다. 그로 안될 때는 로자 아줌마의 지하실과 모모, 아르튀르와 히틀러를 펼쳐놓고 펑펑 울기도 한다. 맥주를 마시며 나의 어린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 종종 더 외로워지기도 하고 내가 한심할 때도 있고 또 항상 너무 어린 친구들만 불러 모으는게 아닌가 쑥스럽기는 해도 책이 있어 괜찮을 때가 더 많다. 대게는 결국 괜찮아지는 하루로 마감을 한다. 그렇듯 작가 조안나에겐 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들이 있다. 스무살 적부터 주욱 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여지껏 책에 대한 책들만 써왔던 사람이지만 이번엔 그림으로 버무려진 담백하고 슴슴한 에세이를 썼다. 전문가도 아니고 깊이 있게 공부했다고도 할 수 없지만 뭐 어떠랴. 어차피 읽는 우리들도 다 전공자는 아닐진대. 궁금한 건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 그림에 담긴 조안나의 이야기이므로 아무 상관도 없노라고. 수줍어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좋았노라고.

무사히 수술을 마친 엄마를 병원에 모셔놓고 잠시 틈을 내어 집에 돌아갔을 때 펑펑 울다 떠올린 코로의 하늘을 이야기한다. 좋아하는 색이 모조리 담긴 것만 같은 고흐의 정물화를 보여주고 매일 같이 내리는 눈에 풀 죽었던 작가를 위로한 라울 뒤피의 바다와 파리의 풍경 앞으로 독자의 등을 떠밀기도 한다. 제인 오스틴을 떠올리게 했다는 페어필드 포터의 화보 같은 그림에 감탄하다 작가가 인용한 <설득>의 구절을 찾아 내 책장을 뒤졌다. 주말의 휴식 같은 기분을 한껏 끌어올리는 르누아르의 뱃놀이 속 솜털 같은 청춘들이 예뻐 함박 웃음이 났고, 눈 앞에서 참방대는 클림트의 초록 앞에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이 그림을 소개한 작가에게인지 이 그림을 그린 클림트에게인지 구분할 수 없는 고마움이었다. 작가의 애완묘 두루의 사진과 존재 자체가 그림 같은 명화 속 고양이들을 보며 주먹을 꾸욱, 폭발하는 귀여움이 몇 장 안되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책을 구길 뻔 했다. 독서하는 다양한 여인들의 그림을 보며 그림 속 책의 제목을 알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왜 화가들은 책의 제목은 표기하지 않았을까 아쉬워졌다. 표지가 된 앙리 마티스의 <꽃병 옆에서 책 읽는 여인>은 나처럼 그림이 있는 책을 읽는 것 같다고 추측만 해본다.

작가 조안나가 시시때때로 찾고 검색하고 방문하고 조사하고 소유하고 감상해 온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가 조근조근 차분하게 펼쳐지는 시간들이 얇은 책 속에 풍성하다. 엄마의 배 속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엄마의 감상 속에 작은 심장 소리를 더했을 태아가 어느 덧 세상에 나온지 6개월이 됐다는 후기에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작가가 지금껏 써왔다는 독서 에세이들을 꼭 읽어봐야지. 상황과 기분에 따라 떠오르는 그림들이 다양하게 생길만큼 나도 열심히 공부해봐야지. 또 나를 위로하고 껴안아줄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야지. 이러저러한 결심을 덧붙이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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