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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영장류 연구자가 되기 위해 15년의 시간을 끊임없이 정진했던 이진이. 그녀가 서른 다섯이 되어 자발적으로 꿈을 포기하고 연구센터에 사직서를 냅니다. 사육사가 되어 제 손으로 처음 키운 침팬지 팬이 출산하는 오늘이, 밀반입된 보노보가 탈출해 구조를 요청한다는 119의 전화를 받고 길을 나선 이 밤이 진이의 근무 마지막 날입니다. 자정을 넘기면 이제까지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그랬어야 맞았습니다.
비오는 밤, 난폭한 스승의 운전이 묘사되던 그 순간 사고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신 당한 스승의 마음과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지 못하는 제자의 속내를 안은 차가 고라니를 피하기 위해 꺾였을 때 망고 냄새를 풍기며 진이의 품에 안겨 있던 보노보 지니가 눈을 뜹니다. 새카맣게 벌어진 지니의 눈동자가 만들어낸 마법이었을까요? 차장을 뚫고 나가 계곡으로 던져진 진이의 육체처럼 진이의 영혼도 육신을 벗어나 보노보 지니의 몸에 안착됩니다. 하나의 몸에 담긴 두 개의 영혼. 인간의 몸이 아닌 영장류의 몸에 들어간 진이가 느끼는 혼란과 깨어 있을 때에도 실은 잠든 것과 다름없는 보노보 지니의 기억들이 교차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갑니다. 이 모든 상황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진이의 영혼이 진이의 육체와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고 직감처럼 느끼는 진이, 진이를 도와 그녀들을 만남을 성사시키려 애쓰는 민주, 진이와 민주의 마음도 몰라주고 불쑥 튀어나와 소란을 일으키는 지니. 두 인간과 한 영장류의 사흘밤의 고군분투가 띠지의 문장처럼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시간의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ㅡ 버트런드 러셀
<진이, 지니>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작가님이 독서노트에 옮겨 쓴 이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순간'이 어머니에게 닥쳐오기까지의 만 사흘, 그 시간을 회상하며 어머니를 찾다가 멈출 수 없는 상상으로 진이와 지니, 민주의 이야기까지 나아가게 되셨다구요. 판타지로 장르를 잡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진이와 지니의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만 같은 간장종지 인생의 민주에게 공감하고, 잘못된 선택으로 죄책감을 안고 꿈을 포기했지만 생을 전력질주 하며 최선을 다하려는 진이의 의지에 감동하고, 지니가 쏘아주는 검지 총의 안녕에 덜컥 주저앉으려는 심장을 일으키며 마침표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진이가 지니에게 지니가 진이에게 진이와 지니가 민주에게 민주가 진이와 지니에게. 서로를 향해 뻗친 손으로 이해와 애정과 구원을 교환합니다. 책 속에서 뻗어나온 그들의 손에 독자인 저도 손을 포개어 함께 울고 함께 웃었습니다. 소중한 책으로 오래 품고 아껴아껴 다시 읽고 또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