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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우리의 하늘이었다 ㅣ 아르볼 N클래식
패트릭 네스 지음, 로비나 카이 그림, 김지연 옮김 / 아르볼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귀엽거나 예쁘거나 사랑스럽거나. 그간 제가 만나왔던 그림책들은 대게가 그런 깜찍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우리의 하늘이었다>는 여태까지의 제 취향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섬뜩하고 강렬하고 비통하며 애처로운 느낌이 물씬물씬. 날카로운 바다 속 풍경에 소름이 다 돋습니다.
표지의 배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올린 건 그리스로마 신화의 테세우스였습니다. 크레타에서 살아 돌아오면 흰 돛을, 시체로 돌아오면 검은 돛을 달겠다던 부자의 약속은 아들의 실수로 뼈아픈 비극을 낳았지요. 표지 속의 하얗고 거대한 배가 테세우스의 것이라면 이 그림책의 끝도 마냥 휘몰아치는 풍랑처럼 어둡지는 않을텐데 생각하며 책을 펼칩니다. 허먼 멜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닥터 후의 원작자인 페트릭 네스가 쓰고 로비나 카이가 그린 모비 딕을 재해석한 그림책입니다. 그러나 저로써는 그 "재해석"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감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제가여태 그 유명한 모비딕을 못읽었기 때문입니다. 신간을 만날 때마다 매번 생각하는건데 전 왜 이렇게 처음 만나는 작가, 모르는 책, 못읽은 책이 많은걸까요? 책 좀 읽는다는 말을 어디가서도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 그림책을 읽기 전에 모디빅부터 읽어볼까 했는데 작가정신에서 출간된 모비딕의 페이지가 780인 것을 확인하고 고민을 살포시 접었답니다. "모비 딕과 평행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셨다는 역자님의 말씀을 언제쯤 공감할 수 있을지 기약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비 딕을 몰라서 이 그림책이 별로냐? 잘 이해가 안되느냐?? 하면 제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에이하브 선장도 모르고 이스마엘이란 이름도 들어본 적 없지만 고래 밧세바가 들려주는 바다와 알렉산드라 선장과 토비 윅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깊은 바다가 하늘, 공기를 들이키기 위해 한번씩 올라가야만 하는 대기는 심연이라 말하는 고래 밧세바. 밧세바는 한번도 사냥꾼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할머니의 예언처럼 결국 알렉산드라 선장의 항해사로 사냥꾼의 삶을 시작합니다. 밧세바의 세상에선 작살도 그물도 하물며 배조차 인간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인간이 고래를 사냥하듯 고래 또한 배를 몰고 도구를 이용해 인간을 사냥합니다. 알렉산드라 선장이 목표로 한 인간은 게중 특출납니다. 고래와 인간들 모두에게 악마라 불리는 토비 윅, 그가 살해한 고래는 숱한데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으며 누구에게도 상처 입은 적이 없다는 무적의 인간입니다. 토비 윅에게 작살을 맞아 치명적인 장애를 갖게 된 알렉산드라 선장의 원한은 고래 뼈에 사무칠 정도라 그를 찾기 위한 그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지요. 오리무중인 토비 윅을 찾아 망망대해를 떠도는 선장과 밧세바. 영영 토비 윅을 찾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파도처럼 일렁였지만 운명처럼 만난 소년 드미트리우스에 의해 밧세바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악마와의 조우를 기록하게 됩니다.
"하지만 밧세바, 그 싸움의 끝에는 결국 악마만 남는 거 아니야?"(p99) 인간들의 손에 엄마를 잃은 밧세바, 그리하여 자신 또한 악마가 되기로 한 어린 고래에게 던지는 드미트리우스의 질문이 인상적입니다. 서사의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그림책이지만 작가의 역량이 훌륭해서인지 짧은 글에서도 풍부한 의미를 찾으며 빠져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모디 딕을 만나게 된다면 다시 한번 밧세바와 알렉산드라 선장을 펼쳐들리라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