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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24살의 아일린. 아일린은 죽은 엄마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입는다. 엄마의 절반도 안되는 꼬챙이 같은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몇 겹씩 겹쳐 입고서 엄마의 악세사리, 엄마의 구두, 엄마의 장갑을 끼고 교도소로 출근한다. 엄마가 그리워서? 설마..죽은 엄마는 아일린이 지하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걸 보고서도 문을 닫고 뒤돌아나간 사람이다. 오로지 자신의 불행에만 관심을 가졌던 여자. 아일린은 어쩌면 그런 제 엄마를 닮았다. 출근 전 아침부터 아버지와 진을 마시는 아일린. 전직 경찰인 아버지는 술주정뱅이고 의사의 말에 따르면 이제 술을 마셔도 마시지 못해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맨정신일 때가 없고 그나마 맨정신일 때는 더욱 가혹하게 아일린을 학대한다. 두들겨패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일린의 하찮음을 말로써 각인시킬 뿐. 남이 볼까 겁난다, 얼굴이 그 모양인데 누가 널 건드리겠냐, 네 냄새가 끔찍하다, 너는 군식구다, 누구 궁둥이를 쭉쭉 빨다 왔냐는 등의 거듭된 비하와 희롱. 그런 아버지와 술을 마시고 구토를 하고 다음 날 술로 해장하는 아일린의 핏속엔 아버지와 같이 알코올에 매료되는 강력한 피가 흐르는지도. 아일린은 외롭다. 친구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다. 좋은 음식을 먹거나 집을 치우거나 내 몸과 내 주변을 깨끗히 하거나 가족 이외의 사람과도 친교관계를 맺는 보통 사람의 기본적인 생활을 배우지 못했다. 아일린은 쓰레기를 먹고 쓰레기와 살고 쓰레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쓰레기처럼 행동한다. 고향 X빌에서의 도피를 꿈꾸면서도 게을러서 혹은 두려워서 제자리에 머무르기를 선택한 아일린. 대신에 도둑질을 하고 자살을 꿈꾸고 스토킹을 하고 변비약을 한움큼 집어먹고 사탕이나 초콜릿 쪼가리를 먹었다 뱉었다 게웠다 하는 일로 결핍을 채우는 아일린. 그런 아일린의 앞에 등장한 매끄럽고 아름답고 지적이고 사교적인 여성 리베카. 두 젊은이의 아름다운 우정 따윈 결단코 없으니 상상하지 말 것. 대신에 두 사람은, 아니 한 사람의 의도로 도모된 범죄는 아일린을 충동질하여 알콜 중독자 아버지를 살해 용의자로 올리는 고민을 하게 만든다. 엄마를 그랬듯 아버지도 인생에서 치워버릴 수 있는 기회. 아일린 던롭의 총구는 어디를 향해 발사됐을까?
74살의 아일린이 들려주는 24살의 아일린,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 아침이 오기까지의 일주일의 이야기이다. 산타의 선물 같다고는 입이 삐뚤어져도 말할 수 없을 성탄절의 그 아침, 백색 눈밭과 아일린의 눈물과 더운 입김과 사슴의 상냥한 얼굴, 묵묵한 걸음,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옛세상의 자취를 상상하며 책을 덮는다. 왈가닥에 명랑하고 밝고 씩씩하고 툭하면 공상에 빠지고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은, 소설 속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대체로 앤 같거나 주디 같다. 아일린은... 아일린 같은 여성은 글쎄, 결코 내 취향은 아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도 굉장히 어려울 줄 알았다. 쉽사리 시작하지를 못했다. 소개글에 사기(?) 당했다고 분개도 했다. 아버지에게 정서적 학대를 당하지만 마음만은 강인했던 젊은 여성이 집을 뛰쳐나가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전형적이고 익숙하지만 매번 봐도 기분 좋아지는 그런 부류의 책인줄로만 알았으니까. 아일린은 정반대다. 강박, 우울, 식이장애, 사회부적응, 열등감이 켜켜히 쌓여 보고 있기 괴롭다. 그 속을 낱낱이 들려주는 묘사에 불쾌하고 비위가 상한다. 책을 읽는 단 한순간도 유쾌한 적이 없지만 이틀을 정독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말처럼 나로서는 처음 읽어보는 류의 작품 그리고 주인공인 것만은 분명했다. 겁 먹을 확실한 이유와 지루하지 않은 더 확실한 이유로 똘똘 뭉친 완전히 개성적인 책, 그게 아일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