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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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오. 난 너라는 문제집을 서른세 해째 풀고 있어.

넌 정말 개떡 같은 책이야.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어." (p40)

쉰을 맞아 우울하던 갱년기의 게이 "레스"를 떠나보내고나니 이번엔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이 된 여자 오영오가 옵니다. 애인의 청첩장에 상심하다 세계일주를 떠난 레스,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홀로 빈소를 꾸리는 오영오. 둘은 외롭다는 점에서는 무척 닮았지만 외로움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많이 달라요. 실연과 사망이라니 무게의 차가 현격한 탓도 있겠지만요. 제가 볼 땐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 같아요. 레스도 난 가난한 무명 작가야 불평하곤 했지만 전 애인이 준 집도 있고 행사에 모셔가려는 출판사도 있으니 당장 먹고 사는데 지장도 없고 비참함도 덜하죠. 공항까지 모시러 오는 대학에 강의도 가고 도서 행사 인터뷰도 하고 축제 게스트로 참여하고 맛집 탐방 기사도 쓰고 평소 하던 일이 아니기에 이벤트 같기도 하거든요. 근데 오영오는 아니에요. 추석 껴서 아버지 장례 치르고도 정상 출근을 해야 하거든요. 오대리 딱풀! 오대리 인주! 오대리 가위! 오대리가 지 따까리도 아닌데, 쓰고 보니 따까리가 맞긴 하지만, 어쨌든 본인 업무가 있는데 종놈부리듯 개인 심부름까지 시켜먹는 부장놈사장놈이 버티고 있는 회사에 나가서 월급 받아야 하거든요. 박봉에, 삼시세끼 같은 야근에, 주휴니 휴가니는 상상할 수도 없는 참고서 출판사에 가서 자리 지켜야 하거든요. 마감 맞추려고 재야의 종소리를 사무실 책상에서 들으며 풀근무 해야하거든요. 슬픔도 짬과 기력이 없으니 들여다 볼 틈이 없어요. 외롭다는 마음조차 햇반에 신김치 볶아 허겁지겁 입에 밀어넣을 때면 사치 같아요. 상상력이 희박한 사람이라도 이게 얼마나 구질구질한 일인지는 아시겠지요? 영오를 보니 샤넬 가방 땅바닥에 내팽겨치면서 울고 싶고 페라리 핸들에 주먹 쾅쾅 치며 울고 싶다는 허세를 못비웃겠더라구요. 어떤 순간엔 허세를 후추처럼 뿌리고 살아야 인생이 매워도 덜 서러운 것 같아서요. 우리 영오 어찌나 짠하던지. 책 띠지에 생계밀착형 감동이라고 써있더니 너무 밀착시켜서 분노조절장애 될 뻔 했어요.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가 부장놈인지 사장놈인지 니는 손 없나! 소리지르고 싶더라구요. 그치만 저는 소심하니까 또 새벽이니까 조용히 입 다물고 계속 읽었어요.

"상처없는 사람 없어. 여기 다치고, 저기 파이고, 죽을 때까지 죄다 흉터야. 같은 데 다쳤다고 한 곡절에 한 마음이냐, 그건 또 아니지만서도 같은 자리 아파본 사람끼리는 아 하면 아 하지 어 하진 않아." (p171)

오영오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고 더하여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서른셋에 이러기도 참 힘들 것 같은데 오영오의 서른셋은 그래요. 하늘 아래 나 홀로라는 감정은 얼마나 숨막히고 두렵고 슬프고 아픈 것일런지요.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가 세들어 살던 집주인이 연락을 해옵니다. "싱크대에서 아버지 유품 찾아놨어요. 가지러와요." 한때는 엄마의 것이었고 또 한때는 아버지의 것이었던 압력밥솥을 떠억 받고서 오영오는 잠깐 상상합니다. 엄마 사후 인연 끊고 살아가는 딸을 위해 밥솥에 돈이라도 모아두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안에 든건 수첩 하나, 많은 공백 사이 딱 세 개의 이름 "홍강주, 문옥봉, 명보라" 뿐입니다. 아차, 연락처도요. 빚쟁이일까 아닐까? 연락을 할까 말까? 정이 희박했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고민하는 영오에게 더는 고민하지 말라는 듯 목록의 첫번째 인물 홍강주가 전화를 해옵니다. 만납시다! 알고 보니 아버지의 주선으로 홍강주는 오영오와 소개팅을 하려했다네요. 딸 입맛은 알아도 남자 취향은 결코 알리 없는 아버지의 소개라니 영오는 제정신인가 싶습니다. 학생의 금연에 집착하는 계약직 수학교사 홍강주는 짜장면에 탕수육, 믹스커피로 오영오를 유혹해(?) 끝내 수첩 속 남은 두 사람을 찾아가기로 약속을 받아냅니다.

"살게요. 그냥 살게요. 오늘 하루, 내일 하루, 운 좋게 모레가 오면 또 하루 더... "(p271)

이름이 영오라 인생도 쩜오 같은 오영오가 남은 쩜오를 만나 1이 되어가는 이야기. 근데 왜 불교 용어에도 점오라는 게 있잖아요. "얕고 깊은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름. 일정한 수행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점점 깨달음."(네이버 지식백과) 수첩은 각박한 세상에 홀로 남을 자식을 위해 아버지가 각별히 선별한 수행법이 아니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는 게 참 못할 짓이다 싶을 때에 울려고 웃으려고 위로 받으려고 펼쳐보면 좋을 책이에요. 쩜오 인생이지만 쿨한 오영오도, 내 가방끈 중졸이면 충분하다는 17세 소녀 미지도, 인생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 주인공이고 싶다는 강주도, 오래 살 것 같다며 통곡하는 두출 영감님도, 미스테리한 그들 문옥봉과 명보라와도 친구 먹고 수다 떨며 스트레스 푸는 기분이 들거든요. 이렇게까지 좋을 줄 몰랐던 책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얼마나 좋길래 그래? 궁금해하며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레스>도 좋아요. 두 권 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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