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그림으로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
이재연 지음 / 소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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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 커다란 대야에 불린 쌀을 잔뜩 이고 방앗간에 가서 줄을 서는 풍경이나 시침하는 이불 위에 굴러다니며 뒹굴뒹굴 하는 모양새나 아이들이 초칠하며 빤딱빤딱하게 닦는 교실의 마룻바닥, 동네 개구쟁이들을 꽁무니에 달고 달리는 소독차, 봄나물 캐는 날의 정경 앞에 잠깐씩 멈춰섭니다. 외할머니 건강하시고 외할아버지 살아계시던 제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요. 첩첩산골의 외딴 시골도 아닌데 어린애 몸통만한 구렁이가 나오던 외가댁은 저 4학년 때까지도 푸세식 화장실에 부뚜막이 있고 아궁이에 잔솔가지며 땔감으로 불을 피워 난방을 했습니다. 밤에는 화장실을 못가서 할머니가 챙겨주는 요강을 썼구요. 어쩌다 외삼촌방에서 잔 날은 요강을 못찾아 옷에 오줌을 싸기도 했습니다. 젖은 옷을 꼭 티비장 뒤처럼 으슥한 곳에 숨겼는데 키 쓰고 소금 얻으러 간 기억은 없지만 아마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어서겠죠? 똥장군 지고 가던 동네 할아버지 뒷모습도 가뭇가뭇하지만 떠오르구요. 창호지문들은 여름방학 겨울방학이면 넘나드는 손자손녀들로 멀쩡할 새가 없었는데 이노무 손아 하고 혼이 나도 그때뿐 자꾸 구멍을 내니 노란 테이프로 너덜너덜한 부분을 붙여두곤 했습니다. 명절에 가면 문이 또 멀쩡해서 그걸 다시 뽕뽕. 아랫목 지글지글한 열기에 누렇게 타있던 장판도, 부엌과 마루 사이 반찬이 오가던 쪽문이랄지 쪽창이랄지 그곳 나무에서만 나던 유난히 콤콤하던 냄새도, 우리가 가면 불을 너무 지펴서 할매 숨막힌다 하며 벌컥벌컥 열어제끼던 문도, 할머니댁 가는 길 군데군데 떨어져있던 소똥까지 그림으로 들려주는 이재연 할머니 이야기를 보며 방울방울 떠오릅니다. 기억하는지도 몰랐던 일들까지, 이를테면 길 한복판의 소똥이 얼마나 컸었는지까지, 차례차례 생각나는 게 어찌나 신기하고 우습던지요.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는 보통 소설책 두 개를 붙여놓은 것마냥 가로가 긴 그림책입니다. 1948년에 태어난, 올해 만으로 71세가 되는 이재연 할머니께서 그리고 쓴 책입니다. 할머니도 그림을 그리며 고향 생각이 더 많이 나고 휴화산이 폭발하듯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셨다는데 세상엔 기억상실증만 있는게 아니라 기억상기증도 있는가 봅니다. 아마도 전염성도 강력한 것 같구요. 페이지를 넘길 수록 더 많은 시골풍경 더 많은 시골냄새가 마음과 코끝을 간지럽혔거든요. 표지의 초갓집이며 닭이며 강아지똥에 똑단발 머리의 얼음땡 놀이 중인 소녀들의 모습이 아주 정겹지요? 본문의 그림들은 표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크고 오손도손 정답습니다. 썩 잘 그린 그림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처럼 저는 이재연 할머니의 그림들도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순간 포착이 잘 되어있는 그 시절 고향의 풍경이 살아본 적도 없는 시간과 경험하지 못한 나날들까지 그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접하는 옛날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맛입니다. 모르긴 해도 비슷한 때에 성장한 어른들은 이 책으로 더욱 재미날 게 틀림이 없는데요. 그래서 설 때 부모님과 친척들과 이 책을 함께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문제는 해버릇한 일이 아니라 쑥스러워 책 이야기를 못꺼내겠더라구요. 결국 저 혼자서만 조용히 감상한 시간이 못내 아쉽고 그렇습니다. 글밥 많은 책은 딱 싫어하시지만 외할머니 약해지시고 유독 어릴 적 얘기, 할아버지 살아생전 얘기를 꺼내곤 하시는 엄마 보라고 집에 몰래 놓고 와야겠어요. 혼자만 보기엔 정말이지 아까운 책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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