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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대체 저는 박완서 작가님께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의외로 무척 유머러스한 글을 쓰는 분이시구나 라는 게 <나의 아름다운 이웃> 속 첫 단편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이었거든요. 의.외.로라니 작가님 작품을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으면서 의외로라니. 네가 대체 뭘 안다고 말이야 하고 자체 반성 시간을 잠깐 가졌습니다. 괜스레 뜨끔하고 부끄럽더라구요. 그야 작가님은 제가 처음 작가님의 이름을 알게 된 중학생 때부터 이미 할머니셨고 한국 할머니의 소설은 1500년대나 1600년대 하다못해 1800년대 쓰여진 책들보다 지루하거나 대단히 교육적일 거라는 생각을 도통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었지만 좁은 시야를 근거로 한 같잖은 핑계죠 뭐. 쓰고 보니 한층 낯이 뜨거워지네요.
화장품 회사의 사보에 올리기 위해 쓰여졌다는 <나의 아름다운 이웃들> 속 단편은 우선 짧습니다. 짤막짤막한 토막글은 요즘으로 치면 웹소설 하루이틀치 연재분이면 딱 맞을 것 같은 분량이라 속 편히 읽기에 얼마나 좋던지요. 한 편에 8 페이지 9 페이지 남짓한 글들이 거의 다니까요. 출근하기 전 남는 짬에 잠깐, 퇴근하고 나서 옷 갈아입기 전에 한숨 돌리며 또 잠깐. 폰으로 이럭저럭한 글들 찾아읽는 시간에 단편 하나를 후루룩 뚝딱 읽고 또 그렇게만 읽어도 책 한 권을 금방 독파하니까 분량만으로도 힙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또 모조리 70년대에 쓰여진 작품들인데 배경이나 말투는 옛것일지언정 구닥다리 유물 같은 사유로 가슴 꽉 막히게 만드는 정서는 거의 보이지가 않습니다. 엊그제 쓰여진 거래도 믿을 것만 같은 이야기 속엔 연애, 낙태, 결혼, 자식교육, 맞벌이, 고부갈등, 아파트 문화, 왕래없이 소원한 이웃들과의 한토막 사연이 담겨있는데요. 마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만국공통의 정서처럼 2019년의 독자와도 높은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처음으로 집에 전화를 들인 일이나 서울 땅 백평을 백만원을 주고 산다거나 창경원 패밀리랜드에 놀러 가기 좋아하는 아이는 너무나 낯설지만요. 슈퍼마켓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척 하는 이웃들, 시댁 오는데 일하기 쉬운 간편한 옷 안입고 왔다고 구박하는 남자,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는 시어머니와 더는 안속는다 어머니 백살은 더 사실거다 지청구 놓는 며느리, 자식의 사춘기를 일식이라 믿고 오늘도 애면글면 뒷바라지 하는 부모님, 사람을 마음대로 골라쓸 수 있는 상품 취급하는 갑의 행태, 이건 참 낯설지가 않잖아요? 하나 같이 내 얘기거나 내 친구 얘기거나 아는 언니 얘기거나 우리 엄마 얘기 같았어요. 남일 같지 않았다는 거죠. 거기다 심각하게 논파하고 투쟁하듯 비난하고 눈물로 호소할 수도 있는 소재를 살짝살짝 꼬집으며 폭풍웃음을 주니 맞는 얘기에도 팩 돌아서고 싶을만큼 마음이 꼬인 요즘 시대에 더욱 요긴할 재능 같달까요. 애니 커트 써세느 커트 얘기엔 침대 위를 구르며 웃었구요. 임신한 엄마가 믿을 사람이 오로지 아빠 한 명 뿐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고. 엄마가 아빠 대신 세상의 따뜻한 인심만 믿을 수 있었어도 뱃속의 나는 죽지 않았을 거라는 태아의 얘기엔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구구절절이 틀린 말이 없어서요.
작가님은 꽁트를 쓰는 재미를 창호지에 구멍 내고 바깥 세상을 엿보는 일로 비유하셨어요. 작가님 뽕뽕 뚫어놓은 구멍에 눈을 대고 엿본 세상이 이다지도 유쾌하고 흥미진진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한때 창호지에 구멍 여럿 내본 사람으로써 이 작은 쾌감에 매우 공감합니다. 작은 구멍으로도 이십년 삼십년쯤 훌쩍 건너 저 먼 세상을 내다보고 썼다는, 그게 우연일지라도, 작가님의 치기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고요. 이런 의미 저런 의미를 떠나 아주 후련하고 단연코 재미있는 단편집이기에 추천해요. 독자 입장에서 그보다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