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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세상의 모든 딸들 1~2 세트 - 전2권
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홍익 / 2019년 1월
평점 :
품절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는 이 맛을 아는 독자님도 있고 모르는 독자님도 있겠지요? 제게도 재독, 삼독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요. <세상의 모든 딸들>은 또 좀 새로운 기분입니다. 출간 30주년을 기념하며 스페셜 에디션이 출간된거라 표지가 옛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산뜻하고 예뻐졌거든요. 그렇다고 30주년 표지 문구에 제 나이를 오해하심 안되욧 ㅎㅎ 중학생 때 어쩌면 고등학생 때일 수도 있지만 실은 읽은 시기만은 가물가물한 이 책을 저는 흙색 표지본으로 대여해 읽었습니다. 총 세 권 짜리 책이었는데 주인공이 달라진 3권은 읽으나 마나였지만 앞의 1, 2권은 처음으로 읽는 구석기 시대 배경의 책이라 남다른 충격을 받았더랬죠. 책 읽느라 밤을 새는 게 흔했던 시절이니 이 책을 읽을 당시에도 저는 틀림없이 밤을 지새웠을 거에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1권 읽고 연달아 2권까지 읽느라 제가 어제도 밤을 꼴딱 넘겼거든요. 다시 읽어도 어찌나 재밌는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성격이 강한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책을 보면 우리는 흔히 빨강머리 앤을 떠올리잖아요? <세상의 모든 딸들>의 주인공 야난도, 특별히 머리색 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틀림없이 빨강머리겠는 걸 하고 생각했더랬어요. 그것도 마구마구 불타오르는 듯한 새빨강이요. 성격도 하는 행동도 앤과 똑닮아서요. 꼬리에 불 붙은 망아지마냥 성마르고 난폭해서 아주 사소한 오해로도 부르르 화를 내고요. 고집이 아주 세요. 자기 주장도 강하고요. 타협이 없죠. 대신에 용감하고 신체 건강하고 자립심이 높은 건 장점입니다. 가족이 모두 죽고 어린 동생 메리와 둘 밖에 남지 않았을 때 야난은 아버지의 무기로 사냥을 하고 덫을 놓고 풀뿌리를 케어 먹으며 길을 더듬어 예전에 헤어진 부족과 약혼자를 찾아갑니다. 어느 오두막에선 어미 늑대와 동맹을 맺고 겨울을 나기도 했죠. 겉잡을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은 끔찍했지만 늑대와의 협업으로 순록을 잡고 남자처럼 사냥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가는 시간은 야난의 자긍심을 채워주었어요. 그러나 어미늑대마저 무리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다시금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렵만으로 먹고 살아야 했던 시절,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동물들을 따라잡지 못하면 굶어죽기 십상이니까요. 메리의 손을 잡아끌며 모든 지혜와 인내심을 풀어내어 일족의 품으로 돌아간 야난. 그러나 이들이 마주한 미래는 아름답지도 매끄럽지도 순탄하지도 않았어요. 사나운 매머드 사냥꾼들과 사귀며 난폭해진 남자들은 여자나 아이를 때리려 들었고 야난은 결코 이에 순응하지 않았거든요. 무엇보다 야난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일족의 성숙한 여인 틸이 있었지만 어머니만큼 섬세하진 않았죠. 임신의 기미조차 알아채지 못한 야난은 굶주림과 추위, 호르몬의 불안정한 작용에 휘둘려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버립니다. 동생 메리의 약혼을 파기하고 사랑하는 남편 티무와도 겉잡을 수 없는 싸움을 벌인 후 이혼을 선언해요. 시부모님의 거듭된 회유 앞에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티무에 자존심이 상한 야난은 결국 일족을 떠나버리죠. 그리곤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을 단지 홧김에 또한번 저질러 버립니다. 잠깐의 쾌감과 길고 긴 자책의 무게를 그 순간 저울에 달아볼 수만 있었더라면. 야난은 두고 두고 이 일을 후회하지만 풀리지 않은 매듭처럼 인생은 갈수록 엉켜버리더군요. 길버트의 머리를 칠판으로 내리쳐 두 동강이 내었지만 끝끝내 그와 함께 행복해졌던 앤처럼 저는 야난의 결말도 평화롭기만을 바랐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구석기 시대 광폭한 대자연 앞에서 오로지 생존만을 향해 뛰었던 조그맣고 약한 인간들의 단순하면서도 투쟁적인 삶에 매료되었어요. 저보고 가서 살으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겠지만요. 티비 속 자연인에게 품곤 하는 동경을 막연하지만 야난에 대입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오로지 먹고 자는 일에만 몰두하는 삶 말이에요. 동물적이고 본능 우선적인. 조그마한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알력이나 다툼을 보는 것도 물론 흥미진진 하구요. 굶주림 속에서 하루하루 예민해져 가는 사람들이 한 오두막 안에서 어떻게 겨울을 나는지를 엿보는 일은 아주 긴장감 넘치거든요. 또 반항적인 야난이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거부하지 못하고 종내 따라가는 삶에 슬프기도 했지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는 거란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나처럼 이렇게 살았어. 호랑이를 따르는 까마귀처럼 남편을 따르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사는 법이란다."(p135) 남자와의 잠자리도 결혼도 출산도 바라지 않았던 아이가 결국 세상 모든 딸들이 걸어온 길에 들어서고야 마는 과정은 왠지 석연치 않고 조금은 끔찍하더군요. 구석기 시대라 결여된 낭만 때문에 더욱 적나라할 수 밖에 없었지만 티무와 사랑을 나누고 티무를 욕망하고 임신을 하고부터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바람은 차근차근 어긋나 버리거든요. 출산과 양육은 세상의 모든 딸들이 걸어온 길의 밑바탕이니까요.
그러나 책을 덮은 후엔 그 끔찍함마저 깜쪽같이 잊어버렸습니다. 지금은 단지 뜨겁고 바삭바삭한 해를 먹어보고 싶을 뿐이에요. 얼마나 배고팠으면 죽은 후 해를 먹는 세계를 꿈꾸었을까. 기름덩이로 활활 타오르는 해를 꿈꾸고 그 해에 창을 던져 잡아먹는 세계를 꿈꾸었을까 싶어 안쓰러운 한편으로 입을 데어가며 해 한덩이를 호호 불어 먹는 상상을 해봅니다. 지상에서 겪은 모든 아픔과 슬픔과 울화가 해의 싱싱한 뜨거움에 사르르 녹아없어지는, 그러한 상상에 황홀해져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