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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자의 뇌가 멈춘 날, 개정판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9년 1월
평점 :
1996년 12월 10일 아침 7시. 박사가 설정해놓은 CD 플레이어의 작동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뜰 때까지는 여느 날의 아침과 다를 바 없었다. 문제를 의식한 것은 잠깐 누웠다 다시 일어났을 때 안구 뒤쪽을 찌르는 둔한 통증 때문이었다.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여유는 주는 아픔이었다. 런닝머신에 올라 뜀박질을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몸통이 감각에서 분리되는 느낌이 밀어닥쳤다. 욕실로 향하는 팔다리가 허우적허우적. 그 와중에도 씻고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녀의 책임감은 놀랍지만 그 책임감이 그녀의 생명에 꽤 큰 위협이었음엔 틀림없다. 욕실에 들어선 박사는 벽에 기대지 않고는 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닥친 문제가 가볍지 않음을, 지식에 근거하여 현재 자신의 상태가 뇌출혈일 가능성을 높게 점친다. 그녀의 뇌가 이미 무너지고 있었기에 구조요청을 결심하기까지 45분이 할애됐고 119를 떠올리지 못해 동료 직원과 병원의 명함을 해석하기까지 다시 35분이 걸렸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그녀는 황홀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뇌 기능을 연구하고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진 과학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 질 볼트 테일러는 뇌과학자다.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뇌에 관한 강의와 연구를 했다. 신경해부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중증 뇌출혈을 겪고 회복한 사람이며 또한 유일하게 그 사연을 책으로 썼다. 남다른 의지를 가진 강인하며 독특한 사람, 육체적 위기까지 기회로 인식하는 조금 무섭기까지한 사람, 박사의 첫인상이었다. 자뇌의 파괴, 언어중추의 일시적 상실. 글로 보기만 해도 두렵고 무서운 일 앞에서도 뇌과학자인 그녀는 뇌의 상태를 자각하려 애쓴다. 또한 자뇌가 멈추고 우뇌가 활성화되어 이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자아가 된 스스로를 사랑한다. 37년 인생의 기억과 힘껏 일구어온 경력의 대부분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살아있음에 기뻐한다. 미국 대통령이 누군지 몰라도 어머니라는 단어를 해석하는데에만 수분이 소요되도 상관없다. 뇌의 회복과 학습, 성장의 가능성을 믿으니까. 지식으로 쌓아온 그 놀라운 회복력을 체험으로 재구성할 의지가 뚜렷하니까. 머리에 23센티나 되는 자욱이 남는 수술을 받았다. 재활치료를 하며 이 책을 쓸 수 있을만큼 회복하기까지 걸린 지난한 시간이 자그마치 8년. 8년이 지나서야 겨우 언어능력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판단이 섰다. 수학적 사고는 더욱 힘들어서 4년 차에 겨우 덧셈을 했고 5년 차가 지나서야 나눗셈의 일부가 가능해졌다. 닌텐도 두뇌훈련과 말랑말랑 두뇌 교실로 그녀는 아직까지도 재활 중이다.
뇌졸증의 경험으로 그녀는 우뇌가 항상 현재형이며 시간감각이 없음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지금, 여기에 집중된 그 충만한 감각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강화된 우뇌로 하여금 그녀 자신의 모험심과 비언어적 소통이 훨씬 활성화 된 것도 느낀다. 자뇌가 완전히 회복되지를 않기를 스스로가 바라는 이유이다. 선택적 회복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녀는 그녀가 단점으로 삼았던 성격의 일부를 영원히 상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 어머니의 말처럼 더 나쁠 수도 있었다. 뇌출혈의 경험은 결코 단점으로만 남지 않았다. 처음 정신분열로 고통받는 오빠를 보며 결심한 뇌과학자로의 삶은 현재진행중. 지난 8년 간의 경험이 더욱 많은 사람을 돕는 밑거름이 될 것을 그녀도 그녀의 어머니도 독자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