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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찾아 산티아고
정효정 지음 / 푸른향기 / 2017년 1월
평점 :
<남자 찾아 산티아고> 옆구리가 시리다 못해 겨드랑이에 고드름이 맺힐 것 같은 겨울. 제목만 봐도 존경스러운 언니를 만났다. 정효정,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더라는 친한 선생님의 얘기에 옳타구나, 산티아고 물이 좋구나, 더 늦기 전에 얼른 가잣! 해버린 여자. 식탁보 같은 치마를 두르고 짐가방 하나 등에 맨채 떠난 언니야의 800km 대장정이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시작돼 버렸다.
순례 첫날, 1km 거리면 택시를 타는 작가가 산티아고에 와서야 고민한다. 800km 여정을, 매일 20-30km씩 걸을 수 있을까? 겁도 나고 걱정도 되고 실패도 두렵고 돌아올 비웃음에 벌써부터 열이 치밀어 잠이 안온다. 순례 이틀날, 걱정이 무색하게 쏟아지는 잠. 이 거리를 걷는 피로감에 잠이 안올 턱이 없다. 문제는 눈에 띄는 대다수 남자들이 중년 또는 노년. 젊은 남자는 아주 씨가 말랐다. 그리고 삼일, 사일, 어느 순간 이미 정해져 있는 길, 신념을 갖고 나아가 보자 결심하며 걷기 시작한 하루하루 속 다가오는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과 얽히고 싶지 않은 인연과 계속 이어가고픈 인연들을 길 위에서 만나게 된다. 변태질량보존의 법칙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 슈가대디, 용서해야 할 존재가 있는지 물어온 노부부 ㅡ 작가는 생각한다. 걷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뭘 또 용서까지 생각하느냐! 상대는 내가 용서를 하든 말든 어차피 잘 살고 있다, 정신승리 고만하자! 언니야의 뼈 때리는 쿨함에 시리게 공감, 지저스를 닮은 과거의 남자와 현재의 남자ㅡ작가와 함께 독자인 나도 순간 가슴이 설렜지만 그럼 그렇지 남의 남자다, 외과의사와 같은 집중력으로 물집을 터트려준 리옹ㅡ 그러나 역시 작가님의 남자는 아니었고, 발가락 양말의 수호자 롭은 이름만 겨우 안채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떠나간다. 존재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감사한 분이다. 장시간 걸을 일이 있을 땐 꼭 발가락 양말을 신으리라 내게도 팁 하나를 전수해 주었다. 남자는 어느 천년에 만날까 텄네 텄어 라는 좌절감은 어두운 밤 작가님의 가슴에 별을 띄워준 수녀님들과 결혼과 아이에 대한 불안감을 순식간에 잠재워준 헨리에타와의 대화로 훌쩍 날아갔다. 솔로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길 위의 언니를 동경했는데 그녀 마음 속이 공허로 채워져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작가는 잠깐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애도 낳아보고 그 애를 성장시켜 독립까지 시킨 또다른 언니는 별 것도 아닌 일인냥 씨익 웃으며 얘기한다. 야들아 그거 그냥 갱년기야. "네가 뭘 하면서 살아도 어차피 갱년기가 오면 인생은 공허해지거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p210) 작가와 함께 나도 무척 심각해졌다가 작가와 함께 나도 같이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남부끄러워 순례길에 오른 여행자들에겐 동기를 설명하지 못했지만 독자인 나는 작가의 얼척없는 시작에 공감했다. 아이슈타인의 말처럼 매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꿈꾸는 것은 미친 짓이니까. 순례길을 걸어서라도 어장활로를 개척하겠다는 치기어린 욕구가 남일 같지 않다. 결혼을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결심이 섰다고 생각하면서도 순간순간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번복할 수 없는 때에 후회하는 건 아닐까 갈팡질팡한 마음은 미혼 여성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그 고민만큼 내 또래 또는 나보다 언니인 이들의 삶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 때에 읽으면 정말 좋을 책이다. 내가 꼭 듣고 싶은 말을 어떻게 미리 알고서 해준 것만 같은 그런 순간순간들이 책 속 여기저기 휘날리는 빨래처럼 널려있거든. 남이 빨아건 빨래를 내 것인냥 척척 걷고 개어 차곡차곡 정리하는 시간. 이 책 한 권으로 삶을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말하기는 우습지만 읽는 내내 매우 시원하고 후련하고 웃겼던 그런 거 알랑가 몰라. 18년에 재미난 에세이를 여럿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 <남자 찾아 산티아고>가 "공감" 부분에서는 최고로 찰떡같은 책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산티아고에 발을 디뎌 보고 싶은데 무난하게 잘 먹고 잘 자고 이게 안되서 좀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꿈을 희망 목록표에 올려본다. 또 아는가. 내가 산티아고에서 남자 찾아오는 할머니가 되어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