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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이 예쁘다. 주홍 표지 속 산수유 열매를 따먹는 소녀를 보며 입맛을 다신다. 보리똥이나 벚찌와는 또다른 맛의 산수유 맛을 얼마전에 본 탓이다. 다 익은 건지 가늠할 순 없었지만 시큼달짝한 맛이 좋았다. 홍차와 장미의 나날도 딱 그런 맛. 처음엔 약간 떫듯이 시큼하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맛이 달아진다. 마치 익어가는 것처럼.
일본 근대 문학의 대표 작가 모리 오가이의 장녀로 태어난 모리 마리 여사. <홍차와 장미의 나날>은 그녀가 독일에서 유학했던 엘리트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정갈한 사랑에 대한 끝없는 회고이자 추억담이다. 그녀가 소개하는 대다수의 맛있는 음식들은 유학한 아버지로부터 기인했거나 본인의 프랑스 유학 경험 또는 어린 시절 유복했던 가정환경에 기초한 것으로 "돈은 없어도 마음만은 귀족"이었던 한 여성의 일생을 받쳐준 소확행의 근간이 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소설이 안 써진다"며 불평하는 미식가이자 소설가이자 에세이 작가의 얘기를 읽다 보면 어쩐지 행복한 마음이 부풀고 입가가 느슨해진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라기 보단 뭔가 막 포슬포슬한?우리 이상으로 보수적인 일본에서 두 번이나 이혼했던 과거가 발목을 잡지 않았을 리 없건만 꾸밈없이 순진한 소녀 같은 모습에도 매력이 넘친다. 아무리 밉게 보려해도, 예를 들면 이런 마음, "모리 미쓰코는 분명 독신이다. 지금은 젊지만 앞으로 나이를 먹으면 너무 많이 나온다고 말하던 그 사람이 돌봐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드라마든 광고든 나와서 저금해두지 않으면 불안하지 않겠는가. 심술궂게 욕을 퍼붓지 마라. 모리 미쓰 짱은 재주가 좋고 느낌도 좋아서 내가 편애하는 배우다. 언젠가 했던 종업원 역할도 근사했다.(p255)" 등이 나오면 그냥 파하하 웃음이 터지고 묘하게 마음이 기울고 만다.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화법이다 싶은데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 그런 것 같다.
처음엔 공주병 같애, 이혼 후 애들도 다 두고 나오고 라는 생각으로 퍼석퍼석하게 읽었는데 한번 달리 보기 시작하니 자신을 마리라고 지칭하거나 얼굴도 씻으시고 신발도 손수 신으셨다며 소공녀였던 어린 자신을 존대하는 것도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다. 작은 아파트 속 공용 부엌을 쓰며 남몰래 뜨거운 물로 소독하고 침대 앞에 도마를 놓고 야채를 썰며 콧노래 흥얼흥얼 요리하는 그녀를 상상하는 일도 재미나고. 레시피 중에선 가스오부시 국물에 천천히 푹 익힌 당근의 맛이 가장 궁금하다. 당근인데 맛있다니 신뢰는 안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