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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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을 좋아한다. 그림형제나 샤를 페로 원작 동화를 각색한 각종 서사들과 판타지, 넓게는 미스터리와 신화, 가벼운 sf까지. 우주소설조차 과학적인 요소에 반해서가 아니라 비현실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취향으로 한다. 시시콜콜 과학적 근간을 따지는 하드 sf는 안보는 이유다. 그러나 작가들이 만든 이세계를 선호한다고 해서 상상력이 제멋대로 뻗친 타인의 세계가 손쉽게 구체화 될 리 없다. 나는 자주 애를 먹고 종종 좌절감을 느끼며 심하게는 독자인 내 탓을 하며 자기비하에 빠진다. 내 빈곤한 머리와 종이장 같은 상상력이 싫어서. 그런데 구병모 작가의 <단 하나의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여태껏 이해하지 못했던 작품들과 몇 번을 다시 봐도 손에 잡힐 듯 그려지지 않았던 누군가의 세계관은 내 상상력 부족 탓도 아니고 작가의 지나치게 뛰어난 상상력 탓도 아니고 그저 작가의 능력 부족 탓이 아니었던가 하는 그런 의심. 독자로 하여금 상황과 장면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는 힘이 누군가에게는 부족했고 여기, 이 책, <단 하나의 문장>의 구병모에게는 넘쳤던 것이 아닌가 하고.

시작과 끝까지 환상적인 동시에 생생하고 리얼하다. 여기 이곳의 이야기도 저기 다른 곳과의 만남도 깊은 뿌리를 노출하며 눈을 아프게 한다. 그래, 맞다. 이건 구병모 탓이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문장을 갈구하는 인공지능 로봇 백지의 손놀림이 아른아른한 것은. 가상세계 속에서 점멸하는 남자의 영혼과 브라운관으로 창을 열어 남자에게 손을 뻗는, 동정받을 까닭이 없는 여자에게 울음이 터지는 것은. 백사장을 달려가는 아내와 그 아내와 좀체 가까워지지 않는 남편의 달음박질로 심장이 뛰는 것도. 스크린을 펼친 듯 눈 앞이 새까맣게 꺼지는 속에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새기는 총부리에 멍해지는 이유도 모조리 구병모 탓이다. 한 문장을 읽어낼 때마다 구병모의 세계가 내 안으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세계가, 그것도 하나가 아닌 세계가, 이만큼 확고한 형태로 가슴에서 차오른 적이 있었던가. 이 감동을 내것으로만 하고 싶기도 하고 모든 독자들과 나누고 싶기도 하고 설마 이것이 나만의 감격일까 불안해하기도 하며 책을 덮는다. 18년에 읽은 모든 책 중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책이었다.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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