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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평점 :
목욕탕에서 12명의 사람을 죽인 남자, 총으로 칼로 현직 국회의원들과 총재와 보좌관과 일반인들을 죽이고 유혈낭자한 탕 안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다는 남자, 아무 저항없이 고요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는 남자를 생각합니다. 실개천처럼 흐르는 피의 물결을 앞에 두고 냉탕 대리석 바닥에서 울고 있었다는 아홉살 난 아이도 함께요.
남자는 자신이 도구였을 뿐이라고 말해요. 자신에겐 죽이고 싶다거나 죽이고 싶지 않다거나 죽고 싶다거나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어떤 의지가 없다구요. 의도가 죄이지 어째서 결과가 죄가 되냐고 오히려 되묻네요. 겁쟁이의 도구가 되어 그를 강인하게 만들어주었을 뿐이고 원한 가진 이의 흉기가 되어 상대를 찔렀을 뿐인데 왜 자신이 죄책감을 가져야 하냡니다. 사형수 474의 괴변에 교도관 윤은 일순 대꾸하지 못한 채 감옥을 나옵니다.
윤은 사형수 474가 궁금해요. 출생신고조차 되어있지 않은 신분, 민증도 없이 유령처럼 러시아와 한국을 떠돌아다닌 삶, 부모는 있는지 가족은 무얼 하는지, 어째서 이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렇게 저지른 범죄는 몇 건쯤 되는지,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이토록 태연한 이유는 무엇이며, 도통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그가 정말 사이코패스이며 악마인 건지. 투명한 갈색 눈 뒤로 심연처럼 가라앉은 474의 내밀한 속내를 알기 위해 끈기있게 기다리고 숨죽이며 다가갑니다. 사형수 474는 말하죠.
" 담당님. 삶의 작은 비밀을 지키려는 건 본능입니다. 누군가 그걸 강제로 엿보려고 하면 공격할수밖에 없어요. 왜냐고 묻고 싶으시겠죠. 그건 답할 수가 없어요. 답이 없습니다. 본능이거든요.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담당님, 궁금하시다는 것 잘 압니다. 나도 담당님이 호기심에 이끌려 서서히 다가오는 거 좋아요. 재밌기도 하고요. 그런데 각오하셔야 합니다...... 난 그걸 아는 사람을 반드시 죽였거든." (p51,p115)
어느 날 문득 무의미한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는 남자 해준, 딱히 죽고자 하는 의지 없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사형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형수 474와 접견하려는 여자 해경, 사수자리의 운명을 지닌 남자 해준을 죽이게 될 화살은 결국 자신이 쏜 것은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사형수 474의 비밀에 한발한발 다가간 교도관 윤은 그 모든 비밀을 떠안고도 내일을 살 수 있을까요?
정면으로 마주한 악의 정체 앞에서 혼란함을 느끼며 책을 덮습니다. 이 마음이 동정인지 분노인지 판가름이 가지 않아요. 악의 이유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피의 홍수 속에서 울고 있던 그 아홉살밖이는 어떻게 되는것인가. 그 아이의 삶은 무엇으로 해석되어 결정지어 질 것인가. 속이 끓고 눈이 따갑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별은 이 여운이 가신 뒤에야 가능할 것 같아요. 지금은 그저 슬프고만 싶어요.